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위한 기도

전욱진 시인의 「컷트」

by 이영

컷트


어머니 혼자 하는 가게에는

피도 안 섞인 자매들이 많이 온다


구원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

요즘 봄동이 엄청 싸더라

그럼 오늘은 겉절이 해야겠다

근데 변비엔 호박잎이 좋다더라는 소리

그 집 아들은 군대 벌써 다녀왔다

통 눈이 안 보여 돋보기를 맞췄다

근데 세탁기는 어디 거가 좋으냐는 소리


말이 비는 때면 삭둑, 삭둑


그러다 언젠가 나도 한번 들어본 적 있는

생활이 무거워 종일 울고 싶다는 사람의 이름하고

짓눌려서 결국 엎드려 운다는 사람의 이름 그리고

지금 죽을 만큼 아프다는 사람의 이름과

지금은 죽어서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면

자르는 소리가 분명해진다


이야기는 이제 구원이다


시계를 본 자매들 일어나야겠다

말하는 시간은 저녁 일곱시다

아이롱 커트 둘 다 반값만 받고

배웅 나간 어머니 돌아오실 때까지

비질하는 소리는 내가 만들고

말끔히 잘려서 있는 희끄무레한

꼭 마치 이승의 달무리 같은




20년째 다니고 있는 미용실이 있다. 동네 시장으로 들어가기도 나오기도 하는 골목에 자리한 열 평 남짓의 미용실이다. 그곳에는 나를 세 살 때부터 본 원장님이 있고, 머리를 하러 온 아주머니들(혹은 그저 들린 아주머니들), 큰 락앤락 통에 담긴 과자와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바닥에 잘린 머리카락은 대부분 염색된 검은색이었다. 또는 염색 전 잘려나간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들. 요즘엔 안 간 지 오래되었지만 인터넷에 검색해본 샵들의 컷트 비용에 손이 떨릴 때면 그 미용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머리를 다듬으며 들었던 이야기를 아직 기억한다. 한 아주머니의 딸인지, 손녀인지, 아직 학교도 채 졸업하지 않은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남자가 도망가지는 않았고, 함께 살면서 학교도 다니고 육아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주 양육자는 아이의 할머니였기에 그 이야기의 소재는 젊은 부모의 책임감이었다. 나는 약간의 생각에 빠졌다. 어린 나이에 사고를 친 사람을 질책해야 하는가, 도망가거나 지우지 않고 낳은 책임감에 감탄해야 하는가, 혹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에 축복을 느껴야 할까. 모든 어린 부모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영주와 정현 같지는 않을 테니까. 남의 이야기에 멋대로 잣대를 지을 수는 없으니 축복과 불행의 언저리에 앉아 있다가 나온 것 같다.


이 시의 세계에는 “피 안 섞인 자매들”이 축복과 불행의 언저리에 있다. “어머니 혼자 하는 가게”는 언뜻 상가에 있는 작은 교회처럼 보인다. 혼자 영업한다면 작을 것이고, 그 속은 미용 의자 세 개 남짓과 대기용 장의자 하나가 있을 것이다. 장의자에 옹기종기 앉은 사람들. 굳이 자매라고 칭하진 않지만 언니, 언니라고 부르며 이야기하는 중년의 여성들일 테다. 온갖 삶의 이야기를 하고 동네의 모든 소식을 전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때로는 즐거운 이야기, 자랑거리를 꺼내곤 하는 사람들의 모임 장소. 어쩌면 동네 작은 교회의 구실을 하는 이 미용실에서 화자가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 미용실의 본분은 머리를 자르는 것보다 삶의 이야기가 오가는 것, 그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이 자매들은 “구원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들의 자세한 이야기를 먼저 내어놓는다. 보통 교회의 본분이라고 하면 구원, 십자가, 성경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람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 먼저 모인 자들끼리 사담을 나누기 마련이다. 시장 혹은 마트에 다녀온 자매님의 봄동이 싸다는 소식. 소식을 들은 자매님은 겉절이를 해야겠다면서 아마 미용실을 나선 후 봄동을 사러 갈 것이다. 변비가 있는, 혹은 변비 걱정에게 호박잎의 정보를 전달하는 자매님. 자식의 주된 소재인 결혼, 취직, 군대의 이야기를 하는 자매님. 중노년의 필수 과정인 노안을 겪어 돋보기를 맞추었다는 자매님과 또 한참 이어질 세탁기는 어디 것이 좋다는 정보들. 더불어 지금 존재하는 장소는 미용실이기 때문에 머리를 하는 소리 또한 날 것이다. “말이 비는 때면 삭둑, 삭둑”이라는 행을 보아 화자의 어머니는 자매님들의 머리를 컷트 중이다.


이 미용실의 교회같은 면모이자 주된 이용 방법은 이들의 사담이 끝날 때 드러난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을 때. 컷트하는 삭둑, 삭둑, 가위질 소리만 들릴 때. 마치 엄숙하게 기도하는 찰나의 침묵처럼 흘러가는 시간. 머리카락이 잘리지만, 실상은 “피도 안 섞인 자매들”이 내어놓는 이야기들이 잘려 미용실 바닥에 쌓이고 있다. 자신의 삶에 관한 가벼운 무게를 미용실에 내려 놓고 머리카락처럼 삭둑, 삭둑 잘라두고 간다. 가벼운 이야기들을 전부 자르면 진짜 이야기는 이 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다 언젠가 나도 한번 들어본 적 있는

생활이 무거워 종일 울고 싶다는 사람의 이름하고

짓눌려서 결국 엎드려 운다는 사람의 이름 그리고

지금 죽을 만큼 아프다는 사람의 이름과

지금은 죽어서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면

자르는 소리가 분명해진다


자매님의 이름에서 이름들이 계속 나온다. 누구는 그랬다더라, 누구는 어떤 일이 있었다더라,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더라, 가 아닌 “사람의 이름”들이다. 자세한 상황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2연에서 나온 자매들의 이야기는 구체적이다. 어떤 일이 있었고, 그래서 무엇을 했고, 지금은 어떤 게 싸다는 정보들. 하지만 4연에서는 누군가가 어떻게 괴로워한다는 말조차 없이 누가 아파한다, 누가 짓눌려 엎드려 운다는 말만 한다. 이는 꼭 다 같이 모여 괴로운 사람들을 두고 하는 중보기도처럼 보인다. 자세한 내막은 들추지 않은 채 이름과 상황만 공유하며 겹겹이 쌓이는 기도. 기도는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부터 기도가 되고 위로가 된다. 더불어 이 시집, 여름의 사실에 나오는 화자들의 기도는 “기도하고 있어요,/ 나는 도서관처럼 조용했다(「기도하고 있어요」)” 처럼 고요하고, 신앙은 “그럼에도 신은 나를 사랑한다/ 굳게 믿는 사람이 내 옆이라면/ 돌아가는 동안에는 한번쯤/ 믿어보는 척이라도 해줄 거다(「소금과 빛」)”처럼 다정하다. 따라서 이 시의 화자 또한 고요한 기도를 듣고만 있다. 어떠한 말도 얹지 않고, 언어가 아닌 침묵과 잘라냄으로 이어지는 기도를.

이 엄숙한 기도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분명”해진다. 자를 곳이 확실한 가위와 향하는 대상이 확실한 마음. 대상들의 이름은 화자도 “한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적어도 아는 사람 내지는 작은 미용실의 단골 자매들이 종종 꺼내던 이름들이겠지. 아주 먼 세상의 완전한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다. 언젠가는 그곳에 화자의 이름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가 온다면 화자 혹은 화자를 위해 기도해줄 자매님들이 다시 누군가의 불행을 엄숙하게 잘라내어 전달하고, 두고 가기 위해 미용실에 올 것이다.

“이야기는 이제 구원”이 된다. 미용실이 교회의 역할을 자처하고, 손님은 자매(성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면 이 세계의 ‘신’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부재한 세계에서는 성도들만 존재한다. 이 세계의 신이 원래부터 부재하였는지, 혹은 존재하였다가 사라진 것인지, 존재하지만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이 미용실 속의 구원은 이야기와 침묵하는 기도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야기로 오가는 불행과 기도로 전달되는 위로. 불행과 위로가 연속되는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다정을 느끼고 사랑을 느낀다. “자르는 소리가 분명해”지는 엄숙한 침묵 속 위로는 이 시의 세계 속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매들은 저녁 일곱시가 되자 일어난다. 일곱시라고 하면 가정주부가 전업인 사람들이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며 돌아가는 시간이다. 또한 직장인이 퇴근해 집에 들어오는 시간과도 맞물린다. 일상을 끝내고 나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자매들은 이 다정하고도 떠들썩하지만 고요한 장소를 떠나 각자의 삶을 속으로 돌아간다. 가게의 주인, 즉 교회의 주인(신이 없다면 교회의 주인은 인간일 테니까)인 어머니는 끝까지 다정하다. 정이 있다는 표현에 더 가깝겠지만, “아이롱 커트 둘 다 반값만 받”은 다음 “피도 안 섞인 자매들”이 돌아가는 길을 “배웅”하러 간다.

미용실에 홀로 남은 화자는 자매들이 잘라 남기고 간 이야기를 정리한다. 청소기로 단숨에 빨아들이는 것이 아닌 비질하여 쓸어 담음으로 “삭둑, 삭둑”과 엇비슷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어떤 사연이나 이야기는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더불어 화자가 모으고 있는 머리카락은 “말끔히 잘려서 있는” 모양이자 “희끄무레한” 색이다. 사람들이 놓고 간 마음은 아주 깔끔한 모양새이자 다난한 흔적을 지닌 색이다. 화자는 “이승의 달무리”라고 표현한다. 달이 가진 띠 모양의 빛. 해가 지면 사라지지만, 어둔 밤 만큼에는 선연하게 존재하는 불행과 고통을 화자는 아름답게 표현하며, 다정하게 쓸어모은다. 어떤 봉투에는 이 머리카락만이 한 무더기 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머리카락이 자란다면 사람들은 다시 모일 것이다. 자신들의 이야기와 고통을 겪는 중인 누군가의 이름으로 자란 흰 머리카락을 달고. 혹은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더라도 구원이 필요한 이름들을 들고, 다정함을 나누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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