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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드라이브 마이카」, 「셰에라자드」를 읽고

by 젤리

컴 투게더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2014) 중 「드라이브 마이 카」, 「셰에라자드」를 읽고

1988년. 올림픽이 있던 해다. 책을 알게 된 경로는 기억이 안 나는데 삼진기획에서 출판한 빨갛고 초록색인 상, 하권 『노르웨이 숲』을 읽었다. 재밌었다. 그리고 신선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그 시절 문화의 아이콘이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그의 책은 필독서였을 정도였다. 문화적 콘텐츠가 한정적이거나 누릴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만큼 그는 나에게 얼마만큼은 문화적 허영심을 채워줬다. 그의 소설을 읽어야 했고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음악을 듣고 음반을 샀다. 특히 재즈 관련 서적을 읽고 이태원 ‘올 댓 재즈‘까지, 가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은 문화적 소양을 확장하는데 손쉬운 방법이었다.


『태엽 감는 새』(1995)를 마지막으로 읽었다. 그의 책이 재미없어서가 절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읽기에서 멀어졌다. 그 이후로도 하루키의 명성은 대단했고 많은 책이 출판됐으며 매스컴에 계속 등장했다. 23년도에 발행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도 옛날만큼 인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올해(24년) 희수며 등단 45주년이 됐고 여전히 책을 쓴다. 정년 퇴임이 없는 직업, 글쓰기 작가에 충실하다.


’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비틀스 노래 제목이다. 베토벤 현악 사중주도 등장한다. 음악 등장이 하루키답다. ’ I’ve found a driver and that’s a start‘라는 노래 가사처럼 배우 가후쿠가 미사키를 운전기사로 채용하면서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된다. 노래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채용하지만, 소설에서 가후쿠는 운전기사로서의 여자에 대한 편견을 가졌었지만, 뛰어난 운전 기술을 보고 미사키를 채용한다. 차종은 스웨덴제 사브다. 일본에서는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는데 이 차는 왼쪽에 있다. 이것은 무엇일까. 운전하기 불편할 수도 있는 사브 차를 굳이 왜 등장시켰을까. 이것은 불편하더라도 서양 문화를 좋아하는 개방적인 하루키의 성향이라 볼 수 있겠다.


이 소설에서 공간적 배경을 투 트렉, 차 안과 밖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차는 중심 소재며 공간으로 지극히 한정된 장소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공동 운명체다. 좁고 앞으로 달리는 차는 그들을 좀 더 친밀하게, 미래를 향해 달리게 한다. 가후쿠는 미사키를 운전기사로 고용했지만, 뒷좌석이 아닌 조수석에 앉는다. 조수석은 암으로 죽은 아내가 앉던 자리다. 가후쿠가 아내 자리에 앉아 아내를 이해하려는 모습이며, 또한 미사키와의 관계가 고용주와 피 고용주가 아닌 평등한 관계라는 의미다. 관계 변화는 두 사람이 앞으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임도 알 수 있다. 이 자유로운 관계에서 이들은 각자의 상실감을 이야기한다. 이 좌석 배치는 하루키의 영민한 소설적 계산이라 생각한다.

차 안은 실제고, 밖은 연기하는 곳이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가후쿠는 아내가 네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을 알지만, 모르는 체하며 결혼 생활을 했다. 이 또한 연기며, 아내가 죽은 후 그녀의 네 번째 남자 다카쓰키와 친구로 지내는 것도 연기다. 차는 연기하며 사는 세상에 둘러싸인, 고립된 섬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각각의 상처로 고립된 것처럼.


다카쓰키를 친구처럼 만난 가후쿠는 ’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안 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진정으로 타인을 이해하려면 나 자신을 깊이 응시해야 한다.‘라는 다카쓰키의 말이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다. 가후쿠도 그 앞에서 더 이상 연기하지 않고 관계를 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후쿠를 후벼 파는 의혹은 자기보다 뛰어난 점이 없는 다카쓰키와 잠자리 한 이유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죽은 딸과 같은 나이의 미사키로부터 가후쿠는 “여자한테는 그런 게 있어요. (중략) 그건 병 같은 거예요. 생각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죠.”(59쪽)라는 말을 듣고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난다. 가후쿠는 이제 배우로서 실제 연극 무대에서만 연기하면 된다. 본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받았다. 상실감에 첨벙이며 사는 사람들이다. 감추고 싶었을 비밀을 자연스럽게 서로 이야기한다. 사람은 때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더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이야기하며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곳은 정확하게는 이전과 똑같은 장소가 아니다.”(60쪽)라고 한다. 과거와 같은 현재가 아니라 변화하고 성장한 오늘이다.

가후쿠가 미사키의 운전을 “조작 하나하나가 매끄럽고, 어색한 데가 전혀 없었다.”(18쪽)라 표현했듯, 이 소설도 대화가 서사를 이끌어 가며 큰 사건 없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큰 사건이 없다고 해서 주제가 가볍지 않다. 삶에서 겪게 되는 상실감, 고립, 몰이해, 상처 등을 깊이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사브 차같이 미끄럽게 빠져나오는 따뜻한 소설이다. 우리는 물리적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우연히 만난 사람과 편히 이야기하고 위로받기도 한다. 또한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도 불가하며 이해보다는 포기하며 사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을 놓치지 않고 소설로 이어가는 게 하루키의 강점이지 싶다.

「셰에라자드」는 액자 속에 또 액자가 있는 구성이 특이하다. 전체적인 천일야화의 틀과 그 속에 하바라와 이를 돌보는 여자(셰에라자드)의 이야기 그리고 이 여자의 17세 때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몰입감을 준다. 천일야화 형식답게 가장 듣고 싶은 정점에서 이야기를 멈춘다. 천일야화가 그랬듯이 하바라와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도, 여자와 소년의 이야기도 섹스가 빠질 수 없다. 다만 전자를 성숙한 섹스라 한다면 후자는 처음 성에 눈뜨는 모습이다. 어떤 불가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어쩔 수 없다. 다만 다스리지 못할 뿐이다.


사람은 사람이나 사물 등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할 때가 있다. 나도 사람, 음악, 영화, 여행, 물건 등에 빠진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지속되기보다 어느 시기에 멀어지고 돌아보면 왜 그랬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다 때가 있다 ‘라는 말을 믿는다. 그래서 해 보고 싶을 때 하라고 한다. 셰에라자드가 17세 때 그 남자에게 집착했던 것처럼.


소설 초반부는 남자가 하우스에 갇힌 이유나 여자 정체성이 궁금하며 추리 소설 읽는 거 같다. 하지만 서사가 진행될수록 남자의 신분이나 집안에 갇혀서 여자의 조력을 받으며 사는 이유가 궁금하기보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되는 묘한 경험을 준다. 처음에 가졌던 의문들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소설을 쓰기 위한 틀 같다. 어쩌면 하루키가 독자들을 책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소설을 개방적으로 썼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의 개입과 논란은 계속될 거고 이 또한 하루키의 계산 아닐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독자들에게 개방된 소설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 소확행‘이란 표현을 만든 무라카미 하루키. 다시 그의 소설을 읽는 것도 내 소확행이다. 가후쿠와 미사키, 하바라와 셰에라자드, 하루키와 독자는 ’ 여자 없는 남자들‘이 아닌 컴 투게더, 함께 간다. 비틀스의 컴 투게더, 볼륨 높여 오랜만에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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