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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May 15. 2023

생일 편지와 생일 꽃

그의 편지는 추억의 즐거움이다

늘 걷는 길인데 순간, 낯설어 발을 멈췄다. 일 년 중 시선 끄는 날은 며칠뿐, 꽃이 떨어지면 그저 푸른색, 낙엽 지면 앙상한 나무다. 고유한 이름 대신 나무일 뿐이다가 봄이 오면 이름이 보인다. 쏟아지는 철 이른 햇살때문에 간질거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오동통한 손을 합장한 봉오리가 일제히 일어나 터질 준비를 한다. 이건 아닌데… 벌써? 반가움보다 알고 있는 계절 문법에 맞지 않아 구시렁거렸다. 더 있어야 생일인데 이건 너무 어긋나잖아. 음력 생일을 지내기에 날짜는 매년 들쑥날쑥하지만, 아귀가 맞게 생일에 피는 꽃이 철쭉이다. 꽃과 잎이 나란히 나오니 치우침이 없어 이쁜 철쭉이다.

    

“많이 바쁘냐? 이번 주말에 내려올 수 있냐?”

“네. 아부지, 내려갈게요.”

“그랴, 다음 주에 생일이니 내려와라.”

“아부지, 철쭉 많이 폈어요?

”다음 주엔 활짝 필겨.“

  생일이 다가오면 내 상황을 물으셨다. 화단에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넓게 한자리 차지한 철쭉이 있다. 어렸을 때 철쭉 가지 위가 놀이터였기에 생일에 이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골에 사셨던 부모님은 대처에서 혼자 직장 생활하는 딸이 못 내 안타까우셨나 보다. 내려가지 못하면, 생일 축하하며 친구들과 밥 사 먹으라는 편지와 함께 축하금도 보내셨다. 세월에 기대어 축전으로, 전신환, 자기 앞 수표, 통장으로 보내셨다. 어쩌다 오는 버스 타고 시내 우체국, 은행까지 일부러 나오셨을 터다. 집에서 지낼 때면 글과 함께 현금 담긴 봉투를 가방에 쿡 넣으셨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직장 생활 시작쯤부터 돌아가시기 서너 해 전까지 이어졌다. 아버지 편지는 못 받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철쭉꽃은 해마다 오는 선물이다.   


  철쭉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창고 깊숙이 누워있던 기내 가방을 꺼낸 것은. 지퍼를 열어 거실 바닥에 부었다. 흰 봉투, 꽃무늬 봉투, 항공 봉투 등 크기도 다양한 편지가 쏟아졌다. 추억이 앞다투어 흘러나왔다. 친숙한 이름들이 거실 바닥에 물감처럼 번졌다. 언젠가 사용하지 않는 기내 가방에 편지를 뒤죽박죽 넣었고, 손 닿지 않는 곳에 유물처럼 보관했었다. 대부분 학생이 보낸 것이다. 편지 무더기 속에서 아버지 편지는 눈에 띄어 쉽게 건졌다. 흰색 규격 봉투에 앞면 가득한 큰 글씨 때문이다. 수신자는 ‘o재원 선생 즉전’. 사립학교에서 근무했기에 이사 다녀도 변하지 않는 주소라 편지는 늘 학교로 왔다.


연도 별로 줄 세우니 83년 5월 편지가 제일 먼저다. 봉투 겉면 글씨를 한 참 바라보다 천천히 열었다. 40년 만에 다시 읽는다. 따뜻한 아버지 필체, 방금 받은 편지나 다름없다. 읽을수록 목에 얹히는 그리움, 찬물에 풍덩 밥이라도 말아먹어야 내려갈 거 같다. 내용은 생일날 집에서 찍은 사진을 동봉한다는 것과 근무 열심히 하라는 글이다. 사진은 봉투 안에 없었지만 분명 활짝 핀 철쭉 앞에서 찍은 사진 일게다. 사진 촬영을 좋아하셔서 내려갈 때마다 찍어주셨다. 그래서인지 집에서 특히 철쭉꽃 앞에서 찍은 옛 사진이 많다. 난 받기만 했지 생신 때 편지 쓴 기억이 없다. 선물만 날름 드렸을 뿐. 만일 내게 자식이 있었다면 생일 편지를 보냈을까?      


  사랑하는 우리딸 재원아!

  네 생일을 멀리서 어머니와 같이 축하한다.

  이제 봄이 무르익었구나.

  우리 집 연못가에 두견화는 이미 진 지 오래고

  철죽꽃은 만발해서 볼만하며 연못에서는 꽃잉어가 제철을 맞난 듯 활봘히 놀고 있다.

  학교일이 아니었드라면 생일을 집에 와서 셀 것을 그리 않되였구나

  몸 건강히 근무 잘하여라.       

         

  07년 4월 좋은 날

 공주에서 아버지가        


 마지막 생일 편지다. 이 편지는 손 편지가 아닌 활자 편지다. 검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쓰신 편지다. 자판 소리가 가슴을 두드린다. 아버지 편지는 다시 가방에 넣지 않고 파일에 정리하여 눈에 띄는 곳에 두었다. 이제부터 편지 볼 때마다 생일이다. 생일이 철쭉 봉오리만큼 이겠다. 내년에도 올 철쭉의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 아버지가 남겨주신 누렇게 바랜 편지는 ‘그리움의 즐거움’이다. 추억의 즐거움이다. 이번 생일에는 꽃이 진 철쭉 앞에서 셀카라도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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