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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여름 Sep 27. 2023

아들 걱정보다 앞선 동생 걱정

"오늘 이안이가 이레한테 참교육 했어."

"그게 뭔 소리야?"

"이레 공부 안 한다고 뭐라 했다고."

"이레 공부 안 하는 걸 자기가 왜 뭐라 해?"

"공부는 안 하고 만날 피아노 치고 악보만 그리고 있다고 엄청 무섭게 말하던데."


이레 공부 안 시킬 거냐고, 벌써 늦었다고 한 번씩 나에게 겁박을 하더니 나 없는 동안 동생을 대놓고 몰아세웠나 보다. 자기도 초등학교 마칠 때까지 잘 놀았으면서 웬 걱정? 걱정인 건 맞고?


"근데 나 오늘 이안이한테 감동받았잖아."

"왜?"

"이레한테 자기도 아빠가 과외 안 시켜줬으면 바보 멍청이가 되었을 거라고 하는 거야. 과외시켜준 걸 고맙게 생각하는 거지."

"바보 멍청이는 무슨. 내가 공부 잘 할 수 있게 얼마나 잘 키워놨는데. 그리고 자기는 중 1 겨울부터 공부 시작했으면서 이레는 6학년인데 왜 뭐라 해?"

"해보니까 너무 늦었더라는 거지."

"늦기는 뭘 늦어. 잘 하고 있구만. 웃긴 놈이네."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나 빼고 세 부자가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큰 애가 작은 애 보고 어쩌자고 공부를 안 하냐고 심하게 뭐라 했다는 것이다. 백 번 맞는 말이라 해도 동생한테 좋게 말하지 않았을 터, 그래서 이레가 지금 기분이 나빠 있다고. 엄마의 방어막도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동생을 다그치고 몰아세웠을지 안 봐도 훤하다. 


그 와중에 남편은 아들이 과외시켜 준 것을 아주 고마워한다는 사실에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공부하라 소리 안 하는 엄마만 믿었다가는 큰일 날 뻔했다는 뉘앙스다. 어이가 없다. 초등학교까지 사교육은 반대했지만 언제든 공부하면 따라잡을 수 있게 아이들 실력을 유지해 온 것은 나다. 생각 없이 놀게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중 1 방정식까지 수학은 내가 가르쳤다. 방학 때마다 한자도 가르쳤다. 수학교수도 자기 자식 수학은 못 가르칠 거다. 근데 그 어려운 일을 나는 했다고. 애들이랑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유 노?

나는 공부를 안 시킨 것이 아니라 기본은 유지하면서 스스로 공부할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다. 나름 계획이 있던 거라고!


"학원에서 공부는 안 시켰지만 그동안 나름 사고력, 끈기, 내적 동기 이런 작업들을 하고 있었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초등 내내 먼 거리의 시골 학교로 애들 데리고 다닌 줄 알아? 내가 아이의 기초공사를 튼튼히 해 놓았고 당신은 그 위에 집을 지은 것뿐이야. 인정?"


둘이서 서로의 공로를 셀프 치하 하다가 대화는 끝났다.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이안이의 수학 과외가 끝났다. 과외선생님이 가시고 이안이 방에 가서 아들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데 이안이가 그 일을 먼저 꺼냈다. 


"엄마, 제가 오늘 이레 교육 좀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노선을 정확히 정하라고요. 한 길로 쭉 갈 것인지 아니면 여러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넓게 만들어 놓을 것인지."


음악가가 되기 위해 피아노 연습을 겁나게 하는 것이 한 길 파는 것이고 뭐가 되든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해 놓는 것이 여러 길 만들어 놓는 것인가 보다. 엊그제 콩쿨을 나갔던 이레가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콩쿨 나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 참교육(?)을 하게 된 이유였던 것 같다.


"아니 한 길을 뚫을 거면 진짜 열심히 그 길을 가고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해놔야 나중에 무슨 일을 하든 가능성이 열리는 거 아니에요? 이레는 지금도 늦었다구요."


이안이는 지금 자신이 동생에게 어른스럽게 인생교육을 했다는 사실이 뿌듯한가 보다. 제법 뭘 아는 것처럼 으쓱거리며 말한다. 자기도 고작 중 3이면서. 한편으로는 웃기고 한편으로는 대견하다.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님들 희망을 가지세요. 인내하다 보면 가끔 아들이 철드는 때가 옵니다. ㅋㅋ


아들의 말을 듣고 난 후 나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지금 아이는 어른 대 어른으로 나와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드디어 비밀을 밝힐 때가 왔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해놔야 진로를 정할 때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는 거잖아. 처음에는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어. 가장 안전하고 좋은 미래 대비가 일단 공부를 잘하는 거라고. 그런데 살다 보니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어릴 때부터 다양하게 도전하고 인내하고 결국은 성공하는 경험,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도전하는 용기, 그럼으로써 생기는 자신에 대한 효능감, 자신감, 실패에 대한 회복력을 가지는 것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아이가 웬일로 진지하게 듣는다. 지금이 기회다. 내가 왜 공부 공부 안 했는지 알려 줄 때다. 


"엄마가 너를 지켜볼 때 너는 그동안 수많은 도전들을 하고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더라. 너 초등학교 3학년 때 혼자서 1년이 몇 초인지 끝까지 계산해 낸 거 기억해? 종이비행기에 빠져서 만날 비행기 날리다가 기어이 상도 받고. 큐브에 빠져서 온갖 큐브 다 맞출 때까지 했잖아. 원주율 60자리까지 외운 것도 기억나? 그리고 제일 대박은 페트병 던져서 세우기를 무려 3년 동안이나 했어. 결국 페트병 위에 페트병을 거꾸로 세우는 경지에 가고 그걸로 영상 하나를 만들고서야 끝났잖아. 게다가 피아노며 기타, 줄넘기 어느 것 하나도 너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너 스스로 됐다 싶을 때까지 끝까지 해내더라. 그걸 보고 엄마는 이미 알았어. 너의 그 도전 정신과 끈기, 자신감이 공부로 향하게 되면 내가 시키지 않더라도 열심히 할 거라고. 아마 고등학교 가면 너는 더 잘하게 될걸? 너는 이미 자체 엔진이 생겨서 누가 옆에서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굴러가게 되어 있어. 엄만 그걸 키울 수 있게 도와 준거지."


나는 한순간도 아이를 방치하거나 아이의 일에 무관심했던 적이 없다. 나는 엉뚱한 일이라도 아이의 도전이 방해받지 않도록 기다려 주거나 참아 주거나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었다. 그렇게 깊은 뜻을 가지고 키웠는데 그 공로를 아빠에게 다 뺏기게 생겼다. 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거라고 이 아들놈과 남편님아! 


"이레도 마찬가지야. 내가 꼭 이레한테 음악가가 되라고 바라지는 않아. 다만 이레가 지금 피아노 치고 작곡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거 끝까지 한번 해보라고 하는 거야. 무엇이든 끝까지 해 본 사람이 다른 일도 자신 있게 도전하고 또 버텨낼 수 있어, 너처럼. 이레 아직 6학년이잖아. 지금 안 해보면 언제 해봐."


꽤 길게 이야기했는데도 아이는 끊지 않고 진지하게 들었다. 그러더니 책상 위의 먼지 쌓여가던 큐브를 집어 들고는 


"오랜만에 큐브 보여 드릴까요? 섞어 보세요."


하면서 큐브를 가져와 드륵드륵 돌리며 맞추기 시작한다. 금세 큐브는 색깔이 맞춰진다. 아니 이렇게 멋있게 키워 놨구만 늦긴 뭐가 늦었다는 거야. 물론 판검사나 의사 되기에는 조금 늦긴 했지만 어차피 그쪽에는 관심 없잖아.


"엄마, 오늘 제가 수학문제 푼 거 알려 드릴까요? 선생님이 아마 우리 반에 이 문제 푸는 아이는 저 밖에 없을 거래요."


뜬금없이 수학문제를 풀어 보겠단다. 아이는 지금 잊고 있던 자신의 업적(?)을 듣고 심히 업되어 있다. 아빠가 슬쩍 와서 뭔가 싶어 보려 하자 "아빠는 못 알아듣잖아요. 가세요." 한다. 아빠 의문의 1패!!! 왕고소~ ㅎㅎ


또또또 아들은 나를 학생 가르치듯 풀이과정을 싹 지우고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한다. 피타고라스 양반이 몇 번 소환되고 삼각형, 원, 호선, 수선 온갖 도형에서 배우는 용어들이 남발된 뒤에 답이 나왔다. 


"와, 이렇게 복잡한 걸 풀었다고? 원래 쉽게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네가 어렵게 푼 것 아냐? 이렇게 여러 단계를 거치는 문제가 있다고?"

"과외선생님도 이렇게 풀었어요."


"이안아, 이레가 공부 안 하는 것 같아도 너무 처지지 않게 엄마가 잘 관리하고 있어. 그리고 걔도 안 풀리는 문제 풀기 위해 30분씩 매달리는 애야. 너만큼은 못해도 시작하면 잘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와,,, 이 무슨 청소년 드라마에 나올 법한 대화와 장면이 오늘 우리 집에서 연출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폭발하는 와중에도 아들은 자라고 있었다. 아니지, 자란다기보다 속이 채워져 가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는 부모님들,,,, 공부 때문에 아이와 관계 멀어지지 마시고 여유를 가지세요. 공부 말고 아이들이 지금 배워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작은 거라도 스스로 도전하고 노력하고 실패를 이겨내고 성공을 경험하고, 또 도전하고 인내하고 성공하고.. 공부로 성공 못해도 인생 계속 이어가야 하잖아요. 악기 하나를 배워도 어른이 되어서 배우는 것과 어릴 때부터 배우는 것은 얼마나 다른데요.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깝게 공부에 다 올인해요? 


아들이 내 맘 알아줘서 나 좀 우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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