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럽고 힘들 때면 몸이 갑자기 뜨거워진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로 열이 확 오르며,
손끝은 반대로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한겨울에도 외투 안에 반팔을 입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겉옷을 벗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숨이 트이고, 몸이 맞춰졌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울리고,
몸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이상한 열감이 밀려왔다.
밤이 되면 상황은 정반대였다.
손과 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이불을 덮어도, 온열기를 켜도 따뜻하지 않았다.
가슴 위는 뜨겁고, 끝은 차가운 —
몸 안의 온도차가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느낌.
그건 단순한 체온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율신경이 혼란에 빠졌다는 신호였다.
몸은 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려 한다.
그 온도는 생명의 리듬이다.
하지만 자율신경실조증에 걸리면,
그 리듬이 무너진다.
교감신경이 과열되고,
부교감신경이 제 역할을 못 한다.
낮에는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밤에는 얼음처럼 식어버린다.
체온의 롤러코스터 속에서
나는 하루를 버텼다.
처음엔 이 변화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니,
어떤 약도 소용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온도를 기록해보자.”
아침과 저녁, 두 번의 체온을 쟀다.
낮엔 37.3도, 밤엔 35.8도.
숫자는 냉정했다.
그러나 그 냉정함이 오히려 나를 안정시켰다.
불안이라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을 때 커진다.
하지만 기록을 시작하자,
그 불안이 패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기록은 나를 객관화시켰다.
나는 몸의 변덕이 아니라,
리듬의 불균형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을 계속하면서 깨달았다.
내 몸은 하루 중에도 여러 번 리셋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걸 관찰하는 일은 내 몸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체온은 마음의 온도와 닮았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은 유독 뜨거웠고,
감정이 무너진 날은 유독 차가웠다.
체온계를 보는 것은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숫자는 단지 수치가 아니라,
내 안의 ‘열과 냉’의 균형을 말해주는 신호였다.
그래서 나는 하루의 루틴에
‘체온 기록’을 넣었다.
아침에는 손목과 복부를 따뜻하게 감쌌다.
밤에는 손발을 덮는 것보다
가슴과 배를 중심으로 따뜻하게 유지했다.
그렇게 중심 온도를 잡으면
말단부의 냉감도 조금씩 사라졌다.
몸의 중심이 따뜻해야 마음의 중심도 안정된다.
이 루틴에 향을 더했다.
시더우드(Cedarwood).
이 향은 따뜻하고 묵직하다.
숲의 흙냄새를 닮은 이 향은
몸의 중심에 무게를 만들어준다.
나는 밤마다 시더우드 향을 손끝에 묻혀
복부 위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 동작은 단순한 향기 요법을 넘어,
몸과 대화하는 행위였다.
향이 피부에 스며들고,
피부가 그 온기를 흡수하는 동안
몸은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체온을 단순히 측정하지 않는다.
느낀다.
피부의 온도, 손끝의 따뜻함,
그리고 마음의 온도까지.
불안이 올라올 때,
나는 체온계를 들지 않고 손을 얹는다.
“괜찮아, 지금 조금 뜨거운 것뿐이야.”
그 말과 함께,
몸은 다시 서서히 식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