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림

by 박영택

by 봄봄


미술품 중에서 가장 자주 접하고 친근한 매체는 그림이다. 설치와 영상 작품이 넘쳐나고 몇 년 전 인기를 끌다 사라진 NFT 미술처럼 기술과 접목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가장 편하게 느끼는 미술품은 역시 회화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떠올려봐도 압도적으로 그림이 많다.



<오직, 그림>은 쉰한 점의 그림으로 미술사를 설명하는 책이다. 저자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골랐다고 하지만, 전반적인 미술사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본문의 곳곳에서 보인다. 쉰한 점의 그림에는 한 작가에서 다음 작가로 이어지는 사조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가 촘촘하게 짜여 있다.



과연 첫 작품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책을 펼쳤는데, 굉장히 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로마의 프레스코화가 나타났다. 침실 벽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프레스코화는 숲 속을 걸어가며 꽃을 따는 긴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의 뒷모습이다. 세련되고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로마인의 취향이 살아있다.



이탈리아에서 1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에서 시작한 그림의 역사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회화를 지나 인상파를 거쳐 마침내 20세기에 도달한다. 쉰한 점의 작품 중 절반은 20세기에 제작된 작품이라 익숙한 작가 이름이 많이 보인다. 저자가 고른 마지막 작품은 21세기에 키키 스미스가 만든 태피스트리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익숙한 그림을 새로 발견하는 기쁨이 크다. 그리고 예전에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며 마음이 좀 얼얼해지는 작품도 만난다. 요즘 유행하는 단색의 모던한 식기를 연상케 하는 모란디의 정물화가 그랬다. 모란디의 그림은 보고 있으면 쓸쓸한 느낌이 들어서 가슴이 아프다. 그저 정물일 뿐인데, 감정이 실린다. 그 가슴 아픈 느낌 때문에 오히려 더 자꾸 보고 싶어진다. 저자도 비슷하게 느꼈나 보다.


우선 그는 느긋한 색조의 리듬과 절제된 색으로 물체와 장면의 본질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의 소박한 화풍은 관람자를 고전적이고 엄격한 감동으로 이끄는 동시에 묘한 매력에 빠지게 만든다. 명료하고 단순한 그림이지만 마음을 다소 심란하게 한다. 외롭고 쓸쓸하고 허망한 공간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저런 고독을 결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운명이기에 차라리 그것만을 독대하면서, 고독에 전적으로 몰입하면서 살아버리겠다는 단독자의 무서운 결의를 만나기도 한다.”



저자가 뽑은 쉰 번째 작품은 빌헬름 사스날의 그림이다. 나는 색을 많이 쓰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그래픽적으로 표현하는 이 폴란드 화가의 그림을 참 좋아한다. 저자가 선택한 사스날의 그림은 좀 의외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저자는 어떤 지점에서 높게 평가하고 좋아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였다.


일상에서 매번 접하는 ‘아무것도 아닌’ 풍경들이 사스날에게 어느 날 낯설고 기이하게 다가온다. 그는 그런 의문, 이해하기 힘들지만 분명 내부에서 감지되는 힘에 의해 그 대상을 다시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그렸다. 결국 그가 그린 것은 특정 대상의 외양이 아니라 그로부터 촉발된 자기 내부의 컴컴한 초상이다.”



<오직, 그림>을 읽기 전에는 좋아하는 그림부터 펼쳐 보려고 했는데, 그림이 나오는 차례대로 읽어야 이 책을 완독하는 보람이 있다. 순서대로 읽다 보면 복잡하고 긴 미술사가 쉰한 개의 그림으로 간결하게 정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