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요일 오후에 찾아온 뜻밖의 행복

월요병을 잊을 수 있는 것들

by 너울

한 해가 벌써 저물어 간다. 2024란 숫자가 낯설어 자꾸 실수로 2023을 말하던 때가 분명 있긴 했을 텐데 또 새로 바뀌는 숫자에 적응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시작되는 월요일의 루틴을 맞아야 할 시간이기도 하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까지 심신의 자유를 누리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일요일이 되면 월요일을 맞을 생각에 덜컥 겁이 날 때가 있다. 월요일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바로 어제 누렸던 행복을 잊은 지도 오래인 듯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토요일까지는 제법 먼 거리도 자차를 이용하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잘도 다니지만 일요일은 집 근처 어디 나가는 것도 심적 부담이 된다. 뭘 해도 부담이 되니 어딜 가도 그다지 즐겁지 않다.


남편은 월요병이 없다.


"그런 게 왜 있어? 평일이 있어야 주말도 있는 거야."


어느 작가가 썼던 책처럼 평일도 소중한 내 시간이고 인생이라 말하는 남편은 이럴 땐 정말 내 편이 아니라 남(의)편이다. 딴에는 생각한다고 말해주는 조언들이 하나같이 내 속을 후벼 파기도 한다. 정말 짜증 나고 은근 더 화가 나는 이유는 가만히 곱씹어 보면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




트리플 A형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장장 한 시간 사십 여분이나 걸리는 곳으로 외출을 한 적이 있다. 어쨌거나 월요병에 대한 적의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 보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 매거진을 택한 것이니, 그에 대한 노력은 (억지로라도) 해야 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일단 출발은 했지만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추운지, 버스는 왜 신호등마다 걸리는지, 지하철은 왜 내 앞에서 문이 닫히는지, 타의 반으로 나가게 된 외출길은 가는 내내 구시렁구시렁 볼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바로 그곳에 가기 전까지는.


아침도 먹지 않고 추운데 먼 길을 나섰으니 맛집이라도 찾아 끼니를 챙겨야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강추위에 반응한 온몸이 뻐근하도록 아파왔다. 맛집이고 뭐고 주변에서 몸을 녹일 수 있는 곳이면 다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들어간 집이 꽤 성공적이었다. 만석이었지만 막 일어나는 손님들이 있어 운 좋게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칭칭 동여매었던 목도리를 풀고 두터운 겉옷을 벗으며 비로소 움츠러들었던 몸을 폈다. 불과 1분 여만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듯했다.


주머니 속에 꼭꼭 숨겨두었어도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꺼내 호호 불었다. 그 순간 잠시지만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밖은 살을 에이는 듯 날카로운 추위가 여전한데 나른한 겨울 햇살이 비추는 창가는 부드럽고 포근했다. 호떡 뒤집듯 마음이 바뀌었다. 공기 중 가득한 불향 잘 밴 음식 냄새가 갑자기 식욕을 자극했다.


"아, 따뜻하다, 좋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추위에 오그라든 몸처럼 오만 인상을 다 쓰고 있더니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좋다...

허참,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참 별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월요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마음이 참 간사하기도 하지. 어향가지덮밥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내내 행복했다. 이 맛있는 음식을 다 먹고 다시 저 추위로 내몰려지면 혹독한 추위를 핑계 삼아 다시 월요일 생각에 또 한 번 지옥을 오갈지 몰랐지만.


내내 어두운 표정이더니 환하게 밝아진 내 얼굴을 보고 남편이 열심히 휴대폰을 두드렸다.


"밥 먹고 갈 데 있어."

"어디? 날도 추운데 밤 되면 더 춥다. 해 있을 때 그냥 집에 가자."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일단 그냥 따라와 봐."


이 음식점 문 하나만 열면 재차 몸도 마음도 굳어질 나를 생각해 부지런히 휴대폰 검색을 했을 그를 배려해 더 이상의 불평 없이 다시 추위에 들었다. 오래지 않지만 따뜻한 곳에서 몸도 녹였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서였는지 처음보다는 조금 덜 추운 것 같기도 했다. 기분 탓인가. 그렇다면 그 기분도 잠시, 채 십여 분이 지나지 않아 가슴 저변에서부터 스멀스멀 갑갑함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벌써 일요일 오후가 되었다. 주말은 왜 이리 유난히 시간이 빨리 지나는 것일까. 매주 일요일 반복되는 똑같은 생각.


"다 왔어. 길 건너 저기야. 어딘지 딱 보면 알겠지?"


내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남편이 내 동향을 살피며 말했다.


"어머어머, 저기! 웬일이야, 한국에 들어왔다더니 드디어 와보네."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맞은편의 높은 건물을 쳐다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실은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큰 건물이 아니라 그곳 1층에 작게 자리한 한 카페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 한창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그곳.




팀홀튼은 우리 부부가 캐나다 유학 시절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러 나름의 호사를 누리며 행복해했던 곳이다. 둘 다 학생 신분이었던 그때는 홈리스들도 종종 드나들던 '커피타임'에서의 부가세 포함한 1달러짜리 커피면 충분했다. 두세 배 이상이나 되는 가격의 커피는 사치였다. 그러다 가끔 한 번씩 팀홀튼에 들러 커피 한 잔에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헤이즐넛향의 메이플 크림 도넛 하나로, 대단한 부자라도 된 듯 그 호사스러움을 만끽하곤 했다.

그러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캐나다 여행 중에 우리는 반가운 마음으로 팀홀튼에 다시 들렀다. 그곳에서의 커피와 도넛은 더 이상 우리에게 사치가 아니었지만 그 호사스러운 마음만은 예전 그 시절과 같았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던 날, 일부러 그곳에 들러 도넛을 곱게 싸 가방에 넣어 와 꽤나 아껴먹었던 기억이 난다. 도넛을 사 온 것인지 아련한 추억을 넣어 온 것인지. (그때까지만 해도 팀홀튼은 반드시 캐나다에 가야만 접할 수 있었다.)


그랬던 팀홀튼이 내 눈앞에 있으니 에이듯 차갑던 바람에도 호들갑이다. 한국에 들어온 지가 언제인데 야단스럽기는.

눈치 빠른 남편 덕에 만석인 와중에도 운 좋게 자리에 금방 앉을 수 있었는데 앉고 보니 그곳이 또 마침 멋진 트리와 벽난로 앞이니 입가에 웃음이 절로 묻어났다.





솔직히 이곳 커피와 도넛보다 훨씬 맛있는 곳이 대한민국엔 정말 많다. 실제로 그날 팀홀튼에서 먹은 커피는 우리 동네 어느 카페에서 먹던 커피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두렵고 지긋지긋한 월요병 증세를 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팀홀튼과 함께 한 옛 추억이 소중하고 행복했기 때문은 아닐까.


누구에게나 이런 소소하지만 행복했던 경험은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월요병이 있는 누구라도 잠시쯤은 그 증세를 잊게 되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순간을 찾아 이어가다 보니 월요일에 대한 무거운 생각도 그만큼 덜하게 되더라는 것. 그렇게 나는 그날의 일요일 오후도 월요일 아침도 무던히 잘 지나 보냈다.


월요일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서 다시 마음이 편치 않음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뭐,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기분이 단번에 마음먹은 대로 다 바뀌어 주는 것은 아니니까.



p.s. 사람들은 월요병을 어떻게 극복할까? 그냥 견디는 것 외에 나름의 노하우가 따로 있을지 궁금해지는 일요일 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