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과 브런치-1
누구나 가끔씩 이방인이 된다.
제주 시내의 작은 오름 아래 조성된 수목원 안쪽에는 모네의 정원을 연상케 하는 작은 연못이 있다.
개울물을 폴짝 뛰듯이 빨간색 다리가 연못을 가로지른다.
여태 본 바로는 사람들이 지나치기만 할 뿐 대부분 거길 지나가거나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다.
다리에 오르는 사람을 본 건 딱 한 번이었는데 중년 커플이 사진을 찍으려고 했을 때였다.
추측컨대 네 면이 모두 막혀 있어 조망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그곳에 서면 우스꽝스럽게도 반대로 조망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차라리 조금 더 올라가 위쪽에서 다리가 있는 연못을 내려다보면 한결 낫다.
밤이면 숲의 보초명은 가로등이다. 그런데 그 빨간 다리처럼 어색한 건 마찬가지.
한 두 개의 가로등은 그나마 녹색으로 칠해져 소박해 보이지만 반짝거리는 금속으로 된 것이 대부분이다.
간혹 어떤 날에는 숲과 동화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그 다리나 엉거주춤 서 있는 조명이 마치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젊은 날 살았던 도시에서의 나처럼.
즐거웠던 날이나 그저 그런 날이라도 밤이 되면 한낮의 들뜬 감정들은 왠지 힘겨운 슬픔, 외로움으로 수렴되는 것이었다.
모두들 납작하게 눌린 낮의 활기를 밤에 부풀려 즐기려는 사람들처럼 밤이 사라질 때까지 거리의 소란을 계속되었다.
집과 가까운 곳에 자주 가는 카페가 있다. 주로 입구 오른쪽의 긴 나무 테이블에 앉는다.
대로변과는 큰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차들과 행인들의 움직임으로 풍경이 리드미컬하다. 그 덕분인지 졸음이 없는 꿀자리다.
그 자리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어르신 두 분이 있다. 할머니 한 분이 먼저 오셔서 내 옆쪽에 자리를 잡으신다.
그러면서 오래 있다 갈 거냐고 물으셨는데 이유인즉 노인들이라 카페 중간에 앉기가 어색해서 항상 제일 안쪽에 앉는다는 거였다.
사양하시는데 앉으시라고 자리를 비켜드렸다. 어르신은 쿠키 두 개를 건네주시면서 말을 하신다.
“내 나이쯤 되면 빨리 죽어야 하는데……올해 내 나이가 여든여섯인데, 요전번에 넘어져서 허리 다쳤잖아.” 윗옷을 약간 올리고 붉은 복대를 보여주신다.
“네, 그러셨어요, 근데 무슨 말씀이세요, 백 살 넘기셔야죠. 저는 백 이십 살까지 살 건데요.” 어설프지만 진심이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당신들보다 조금 젊은 무리에 끼게 될 경우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시는 경우가 종종 있으시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주위의 시선이 모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당사자가 되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나 역시 머지않아 경험하게 될 상황일지도 모르니까.
요즘 흰머리가 부쩍 늘어 뽑기를 포기했다. 제발 검은 머리카락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자리 잡기를 바랄 뿐이다.
몇 년 전까지 큰애와 같은 나이여서 초등학교 입학 한 날로부터 5년 정도 알고 지낸 젊은 엄마가 있었다.
남편이 독일계 네덜란드인이었는데 아이들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는 관심과 시선에 대해 불편을 토로한 적이 있다.
낯선 사람들이 다가와 아이가 귀엽다며 말을 걸고 심지어 만지기도 한단 거다. 문제는 생각보다 빈도가 높다는 것.
그러다 보니 아이들 중 둘째 아이는 얼굴을 푹 숙이고 다닐 정도로 굉장히 힘들어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의 주위 사람이 국제결혼을 한다고 하면 강하게 말리고 싶다고도 했다.
눈이 참 예쁜 아이들이어서 귀여움을 받을 거라 예상은 했는데 막상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안쓰러웠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지만 타인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상처를 주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알았다.
어찌 됐든 결국 젊은 엄마는 떠났다.
나이나 인종 등 외양만으로 우리라는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외떨어져 있다는 느낌은 누구에게든지 불안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서 슬픔이 느껴질 때 그곳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은 게 인간이니까.
내 이웃과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 누군가가 소외되지 않도록 조금 더 예민함을 키워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