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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현 Jan 19. 2024

다르덴 형제가 보이는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

뤽 다르덴, 장 피에르 다르덴 감독에 대하여

다르덴 형제 감독의 작품 전반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며칠 전 인스타 계정을 삭제했다. 지나가는 사소한 말에도 마구잡이로 휘둘리는 연약한 멘탈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 계정에는 내가 영화에 대해 쓴 아무 말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저급한 글들 뿐이라 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아무런 유감이 없다. 다만 그중 하나의 글 (글이 길다 보니 여러 개의 포스트지만) 만큼은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원래는 글을 좀 발전시켜 새로 브런치에 업로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읽다 보니 그때의 내가 떠올라 차마 글을 고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과거의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글은 2019년 내가 고통받던 대학원생 시절에 작성했던 글이다. 2019년 이후에 개봉한 <소년 아메드>와 <토리와 로키타>는 다루지 않는다. 오타나 정말 말도 안 되는 문장 말고는 모두 그대로 두었다.




Filmography
<거짓 (Falsch, 1987)>
<그대를 생각해 (Je pense à vous, 1992)>
<약속 (La Promesse, 1996)>
<로제타 (Rosetta, 1999)>
<아들 (Le Fils, 2002)>
<더 차일드 (L' Enfant, 2005)>
<로나의 침묵 (Le Silence De Lorna, 2008)>
<자전거 탄 소년(Le Gamin au vélo, 2011)>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2014)>
<언노운 걸(La fille inconnue, 2016)>

Reference
박은지. "우정의 정치학—다르덴 형제 영화의 숨 막히는 생명력." 프랑스학회 학술대회 2015 (2015): 83-98.
Cooper, Sarah. "Mortal ethics: Reading Levinas with the Dardenne brothers." Film-Philosophy 11.2 (2007): 66-87.
박남희. "레비나스, 그는 누구인가." 세창출판사 (2019).





지난겨울, 나는 대학원 3학기 수강 신청 과목을 고민 중이었다. 전공 학점은 이미 다 채운지라 전공을 더 듣고 싶지는 않고, 교양을 듣자니 죄다 관심도 없는 창업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이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아주 정신 나간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렸는데, 바로 연극영화학과 대학원 전공 수업을 신청하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못 따라가지는 않을지, 타 전공 교수님과 대학원생 분들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지는 않을지, 지도교수한테 걸리면 어떡하지 등등을 고민했었다. 하지만 '지금 아니면 이런 수업을 언제 듣냐'라는 일념 하나로 '서유럽영화감독연구' 과목 수강 신청 버튼을 눌렀다.

신청 당시에는 '서유럽권에서 활동하는 주요 영화감독들에 대해서 공부하나 보다'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 수업에 들어가 보니 '서유럽권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 한 명을 골라 내가 연구한다'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대학원에서 연구 = 논문을 뜻한다. 그러니까 서유럽 영화감독 한 명을 직접 선택해서 그 감독에 대한 소논문을 작성하는 수업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 내 졸업 논문도 못쓰면서 연구실 프로젝트 + 타 전공 논문 작성까지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주일에 하루가 될까 말까 하는 내 여가시간을 모조리 내가 선택한 감독의 작품과 관련 논문, 잡지를 보는데 소모해야만 했다. 업무 시간에 연구실 업무를 내팽개치고 영화 공부 같은 걸 했다 지도교수에게 걸리면 무슨 쌍욕을 먹을지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재밌는 건 내가 고통이라고 표현하긴 했다만 그래도 꽤 즐거웠다는 것이다. 나만 몰랐던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을 보고 철학책까지 읽어가며 작품을 분석하는 일은 분명 힘들었지만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적어도 망할 내 전공보다는 재밌더라.

아무튼 어찌어찌 애를 쓰다 보니 무사히 수업을 모두 수강하고 논문까지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자기 논문도 못써서 졸업도 못하게 생긴 놈이 타 전공 논문을 써서 출판까지 도전하는 것은 그야말로 욕심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엔 나름 열심히 쓴 거다 보니 너무 아까워 이렇게 인스타에라도 올려보려고 한다.

내가 조사한 감독은 벨기에의 영화감독 다르덴 형제 (장 피에르 다르덴(Jean Pierre Dardenne), 뤽 다르덴(Luc Dardenne))이다. 나는 작성한 논문을 통해 다르덴 형제가 영향을 받은 여러 인물들 중 프랑스의 철학가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의 철학을 다르덴 형제가 어떻게 영화를 통해 재현했는지를 분석했다.



다르덴 형제


다르덴 형제(뤽 다르덴(Luc Dardenne), 장 피에르 다르덴(Jean Pierre Dardenne))는 벨기에의 영화감독임과 동시에 철학자로도 평가받는다. 다르덴 형제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인류가 처해있는 오늘날의 폭력적인 세계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사유한다. 그들의 철학을 재현시켜 줄 새로운 영화 미학에 갈증을 느껴온 다르덴 형제는 기존의 영화적 규칙까지 과감하게 어기며 그들만의 새로운 영화세계를 구축해 왔다.


이미지의 뒷모습


뤽 다르덴의 저서 이미지의 뒷모습(Au dos de nos images: 1991-2005)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론의 기록이며 영화제작 일기이기도 하다. 초기 장편으로 제작되었던 영화 <거짓>과 <그대를 생각해>의 평단의 혹평을 계기로 집필되기 시작한 이 영화 일기는, 이들의 예술적 영감에의 갈증과 창작의 고뇌에 찬 영화 동지로서의 내면을 내보인다. 또한, 이미지의 뒷모습에는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한 참조가 간략하지만 매우 학술적으로 곳곳에 산재하여 기술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엠마누엘 레비나스'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참조는 이 글에서 인용한 수많은 소설가, 시인, 그리고 또 다른 철학자들의 인용구들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다르덴 형제의 영화 제작에 대한 영감과 윤리적 열망의 신호탄이기도 하다.

존재와 존재자, 계급화와 탈계급화


엠마누엘 레비나스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년 1월 12일 ~ 1995년 12월 25일)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탈무드 주석가로, 프랑스어권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가 및 유대계 작가로 주목받는다. 레비나스는 어렸을 때 리투아니아에서 전통적인 유대교 교육을 받은 유대인이며, 세계 2차 대전의 반유대인정책을 직접 경험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통역 장교로 참전했던 레비나스는 독일군에 포로가 되어 겪은 전쟁의 참상과 죽음을 대면하면서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고 탄압할 수 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서양 사유 안으로 깊이 천착해 들어간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동안 서구 사회를 지탱해 온 전통 사유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이에 레비나스는 이제까지 서양 사유가 중요하게 다루어 온 ‘존재’ 중심의 철학을 폐기하고 ‘존재자’ 중심의 새로운 철학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기존의 서양 철학은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상정하고 이를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여기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하지 않는 참으로 존재하는 이 하나에 의해서 파생된 것이라 이야기한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에 모든 것들을 귀속시키고 나머지를 배제하려 하는 존재 중심의 태도가 오늘날의 폭력성을 불러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레비나스는 존재란 그저 있는 상태일 뿐, 현실적으로 물질을 입고 시간과 공간 안에 구체적으로 몸을 입고 실재하는 존재자야 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직 무엇으로도 있지 않는 그저 있는 상태인 존재는 구체적 현실에서 책임을 질 수 없으며, 개별적 존재자만이 자기가 자기로 되는 일에 구체적으로 책임을 가질 수 있다. 그리하여 레비나스는 존재자가 자기로 정립하는 일을 윤리적인 것과 결부하며 존재자 중심의 윤리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에 모든 것들을 귀속시키고 나머지를 배제하려는 존재 중심 사고방식의 폭력성은 다르덴 형제 영화의 캐릭터 설정에서 나타난다. 다르덴 형제의 대부분에 작품에서 주인공은 사회적 예각에 위치한, 다르덴 형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탈계급화된’ (declassed) 사람들이다.



<약속>의 이고르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도와 불법이민 알선업을 하며, <로제타>의 로제타는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와 단 둘이 캠핑카에서 지내며 제대로 된 직장조차 구하지 못한다. <아들>의 프랜시스는 어린 나이부터 살인죄로 감옥에 갔다가 출소하였으며, <더 차일드>의 브뤼노는 소매치기와 구걸로 연명한다. <로나의 침묵>에서 로나는 벨기에 시민권을 얻기 위해 위장 결혼까지 하며, 위장 결혼의 대상인 클로디는 마약 중독으로 고통받는다.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게 버려지며, <내일을 위한 시간>의 산드라는 16명의 직장 동료를 찾아가 보너스 대신 자신과 일할 것을 선택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다르덴 형제의 작품에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들은 우리 사회가 말하는 ‘일반적인’ 혹은 ‘올바른’ 상황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사회를 이루는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에서 명시적/암묵적으로 정의한 특정한 계급에 속하며, 다르덴 형제의 캐릭터는 이러한 계급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급을 정의하는 사회 역시 레비나스가 말한 참인 존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회는 사회가 정의한 참에 속하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배제하는 폭력의 주체가 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이러한 폭력성은 다르덴 형제 작품에서의 인물들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단, 최근 작품인 <언노운 걸>에서는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캐릭터 설정을 보인다. 주인공 제니의 직업은 의사로,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상위 계급에 위치한 부르주아의 상징과도 같은 직업을 가졌다. 다르덴 형제는 영화 내내 이러한 상위 계급 인물의 윤리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회 상류층의 도덕적 태도를 촉구함을 볼 수 있다.

타자와 환대의 윤리

레비나스는 존재자 중심의 철학을 넘어 나와 같은, 그러나 나와 다른 존재자인 타자 중심의 철학을 말한다. 타자란 자아 밖의 모든 외재성을 의미한다. 즉, 타자는 자아 바깥의 모든 것을 총칭한다. 타자는 지금 나와 같은 시간과 다른 공간에 살아가는 개별적 존재자로 결코 동질화될 수 없는 타자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타자를 사유한다는 것은 '나와 같이'가 아닌 타자의 이질성인 '타자성'을 배려해야 하는 것이다. 타자를 타자로 사유하지 않고 자신의 연장 선상 안에서 사유하는 것은 타자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일종의 폭력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타자성으로 말미암아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무언가를 소유하고, 통제하고, 알 수 있다면, 그것은 타자라고 볼 수 없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타자를 마주하고 환대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선택이 아닌 권리이자 책무임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일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제한된 유한한 존재자인 나는 타자를 통해서만 나를 넘어서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자가 제한적인 이유는 존재자의 고유성이 존재자가 입고 있는 물질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물질은 일정한 질량을 가지며 특정한 공간을 점하기 때문에 어떤 한 곳을 점하고 있는 물질은 동시에 다른 곳을 점할 수 없다. 또한, 물질은 특정 시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시간에 존재하는 물질 역시 동시에 다른 시간대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거하는 존재자는 공간적 제약과 시간적 제약을 모두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특정한 세계 안에 자리하는 존재자의 한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입은 존재자는 자기와 또 다른 물질을 입은 존재자와 만나 자신의 한계성을, 물질성을 극복해 나간다.

그렇기에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무한이 반복되는 의무인 것이다. 타자의 이질성, 즉 타자성은 나를 살게 하는 것으로, 타자는 나를 살게 하는 자다. 이때, 환대란 내 안으로 나와 다른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열린 태도로,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며 그와 더불어 이전과 달리 새로움을 일구어 가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타자에 대한 무한한 환대의 자세로부터 윤리가 시작됨을 말한다. 자아보다 타자를 우선시하는 것에 윤리적 의식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기존의 윤리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이에 따라 배제 또는 복속시키는데 반해, 환대의 윤리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태도를 지향한다.

레비나스 윤리의 독특한 측면 중 하나는 윤리적 관계의 비대칭적 성격에 대해 주장한다는 점이다. 타자를 배려하는 것은 그 답례로 어떤 것을 기대하기 때문으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의무와 책임은 나를 향한 타자의 상호적 책임이 반영된 것이 아니다. 이 비대칭성은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에서 일관된 것이다. 만약 타자에 대해 대칭성이나 상호성을 주장한다면 이는 타자에 대해 말할 권한을 갖는 것을, 타자는 나와 같은 종이나 유에 속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는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타자의 개념과 완벽하게 상반된다. 따라서, 타자와의 윤리적 만남은 필연적으로 한쪽만의 것이며,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는 규칙의 측면에서 형식화할 수 없는 윤리다. 그렇기에 비대칭적이며, 윤리적 관계는 도덕적 코드로 일반화되거나 변형될 수 없다. 이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 나는 타자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도덕적 명제이다. 그러나 ‘그는 나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노골적으로 도덕적 명제가 아니다.”

이렇듯 레비나스는 자아 중심적이고 존재 중심적인 전통적인 서양 철학을 비판하면서 자기 안에 온전히 자유와 책무를 가진 윤리적 주체가 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타자 철학의 개념을 존재가 아닌 존재자를, 그리고 존재자의 존재성을 윤리로, 윤리를 타자에 대한 환대로 확장해 나간다. 다르덴 형제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극적 변화를 유도하는, 즉 주인공을 새롭게 하는 타자가 등장함으로써 타자 철학을 보인다.



<그대를 생각해>에서 주인공의 아내 셀린은 실업으로 극도로 좌절한 남편 파브리스를 구원한다. <약속>의 아미두는 약속의 주체로서, 아시타와 그녀의 아이는 약속의 대상으로서 악행에 동참하였던 주인공 이고르에게 변화를 일으킨다. <아들>의 프랜시스는 올리비에의 어린 아들을 죽인 소년으로, 올리비에의 입장에서 도저히 환대할 수 없는 극단적인 타자의 예시로 등장한다. <더 차일드>에서 소매치기와 구걸로 연명하던 브뤼노는 여자 친구인 소니아와 소매치기 공범 스티브와 마찰을 겪으며 점점 변화한다. <로나의 침묵>에서 로나는 클로디와 지극히 계산적인 관계에서 점점 인간적인 관계로 변해간다.



이 작품들에서 타자 역할의 캐릭터는 분명히 직/간접적으로 주인공의 변화를 일으킨다. 하지만 그것이 타자 역할의 인물이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전거 탄 소년>에서는 타자를 다루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주인공 시릴의 주말 위탁모인 사만다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버려진 시릴을 적극적으로 돕는 조력자 역할을 수행한다. 지금까지의 타자들과는 다르게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도움으로써 이상적인 타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는 보너스와 직장 동료의 고용 여부라는 극단적인 도덕적 선택에 놓인 여러 유형의 타자를 보인다. 산드라는 이러한 타자들과 마주하면서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타자들을 모두 마주하고 마지막에 자신도 동일한 선택에 놓였을 때 고민 없이 도덕적인 길을 택한다. 그녀가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를 초월하여 새로워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언노운 걸>에서 의사인 주인공 제니는 자신의 밑에서 일하던 인턴이 그만두자 이를 마치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그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시골까지 내려간다. 또한,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살해당하기 전 병원 문을 두드렸을 때 이를 열어주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르덴 형제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제니의 모습을 통해 소위 사회의 상위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보여야 할 이상적인 타자의 모습을 보인다.

얼굴과 얼굴의 마주함

레비나스는 우리가 환대해야 할 타자의 모습을 ‘얼굴’로 이야기한다. 얼굴은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기도 하나 동시에 존재자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인격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즉, 레비나스는 얼굴을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개별적 존재자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말로 보고 있다. 이러한 얼굴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시간 속에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얼굴은 존재자의 살아온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 주는 것으로 어떠한 목적도 가지지 않은 정직한 것이다. 이러한 얼굴의 특성을 가리켜 ‘얼굴의 정직성’이라 한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얼굴을 한 자만이 자기의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다며 얼굴을 통해 책임의 문제를 윤리로 연결한다.

타자에 대한 환대는 레비나스의 얼굴을 통해 재정의된다. 타자 역시 개별적 존재자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곧 나와 다른 얼굴을 한 이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열린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다른 타자의 얼굴과 마주할 때에만 타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타자의 소리를 귀담아들을 수 있을 때에만 진정으로 타자를 온전한 하나의 주체로서 환대할 수 있다. 그리고 타자를 진정으로 환대할 때만이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고 경시함으로써 비롯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난 세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얼굴과 얼굴의 마주함’으로 표현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낯선 타자의 얼굴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가 하는 말에 응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타자에 대해 순종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로 나아가는 것, 즉 자기 초월을 뜻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내가 아닌 타자에게로 향하며 그와 더불어 새로움 앞에 서는 일이다. 같아지기 위해, 혹은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닌 나의 존재성이 타자를 향하기에 나는 끊임없이 타자를 향하며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는 서로를 살게 하는 자이다.

다르덴 형제는 영화 내에서 캐릭터의 신체의 일부인 얼굴을 통해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과 얼굴의 마주함을 나타낸다. 물론 캐릭터 간에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은 어느 영화에서나 나타나는 빈번한 장면으로, 여기에 철학을 부여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과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의 작품에서 캐릭터는 타자에 대한 폭력과 환대의 중대한 기로에 섰을 때 타자와 얼굴을 마주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대면 장면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가진다. 즉, 다르덴 형제의 작품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은 타자를 증오하는 자신을 초월하여 타자의 얼굴로 나아가 새로워짐을 나타내는 것이다.



<약속>에서 아시타는 이고르가 남편의 생매장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고르와 얼굴을 마주한다. <아들>에서 프랜시스는 자신이 죽인 아이가 올리비에의 아들임을 알고 도망친다. 올리비에는 도망치는 프랜시스를 붙잡아 목을 조르며 그의 얼굴을 마주한다. 아시타와 올리비에가 각기 마주한 타자는 모두 가족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일조한 자로 이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매우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함께 길을 걷거나 하던 일을 마무리할 뿐이다. 아시타와 올리비에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타자를 증오하던 자아를 초월하여 타자의 얼굴을 향해 나아가 폭력성을 극복하고 새로워진 것이다. 다르덴 형제는 이러한 장면을 통해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자 역시 환대해야 할 타자임을 보인다.



개인을 가장 우선시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미덕이 된 현대사회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에 대한 환대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타자에게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타자를 환대해야 하며 이를 권유가 아닌 책임의 윤리로 말하는 것은 어쩌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가혹하게까지 느껴질지도 모른다. 특히 나를 분노케 하는 타자를 환대하기란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아들>의 올리비에가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납득할 수 없을 수 있다. 올리비에의 아내가 “누구도 당신처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듯이. 하지만, 이들에게 다르덴 형제는 말한다. 오로지 이 길만이 인류가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음을.




내가 작성한 논문 전체 중 1/3 정도만 써서 마무리했다. 나머지는 내가 맘에 안 들기도 인스타에 너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도 뭐해서 생략했다. 한 학기 동안 공들인 논문이 출판 시도조차 못해보고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절대로 투고할만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인스타에 쓴 정도로 만족하려고 한다.

힘들었던 만큼 재밌었다. 사실 이번 학기에 가장 재밌게 열심히 했던 일 같다. 꼴도 보기 싫은 졸업논문, 프로젝트나 부담스러운 조교 업무보다 훨씬 애정이 갔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 끝까지 이 수업을 취미로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일 같다. 취미가 업이 되는 순간 흥미는 사라지고 고통만 남는다는 것을 이미 내 전공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에 영화 보고 끄적이는 이 취미만큼은 고이 취미로 간직하고 싶다.

논문 얘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사실 내 논문의 핵심인 레비나스의 철학도 내가 완벽히 공감하지는 못했다. 레비나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가장 처음 든 의문이 '시오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였다. 안타깝게도 이 의문은 실망으로 돌아왔다.
Q: 엠마누엘 레비나스 씨, 당신은 ‘타자’의 철학자입니다. 역사와 정치는 ‘타자’와의 만남의 장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인에게 ‘타자’는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인이 아닌가요?
A: 저의 타자의 정의는 완전히 다릅니다. 타자는 이웃이고, 이러한 이웃은 반드시 친척은 아니지만 친척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당신이 타자에 대해 있다면, 당신은 이웃에 대해 있는 겁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웃이 또 다른 이웃을 공격해서 그를 부당하게 대우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이때 타자성은 또 다른 성격을 나타냅니다. 타자성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적을 발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우리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아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잘못을 하는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보다시피 지금까지 레비나스가 주창한 타자의 정의에 완전히 어긋나는 옳고 그른 타자가 등장한다. 참으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한 가지 더, 레비나스는 그동안 서양 사유가 취해 온 사랑이 구체적 행위로 이어지지 않은, 그래서 실제로는 책임을 갖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구체적인 행위가 없는 말놀이에 불과한 사랑은 엄밀히 말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사랑은 다른 존재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전과 이후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예시로 출산에 대해 말한다. 나는 기존에 사랑에 대한 비판 자체는 공감할 수 있을지언정 출산 없이는 사랑도 없다는 생각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레비나스는 나의 사상을 상당 부분 변화시켰다. 특히, '자아는 타자를 통해서만 새로워질 수 있다'라는 문구는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나에게 굉장히 뼈 아픈 한마디로 다가왔다. '나는 왜 이모양일까?', '나는 변할 수 없을까?' 스스로 수없이 묻던 절망적인 질문에 처음으로 조그마한 희망을 느꼈다. 나는 변하고 싶으니, 무섭고 두렵지만, 밖을 좀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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