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지쳐버린 머리를 식히려 유튜브에 접속해 의미 없이 영상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이 연기한 영화 속 캐릭터를 자신 있게 소개하는 배우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제가 연기한 캐릭터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인물로...' 캐릭터의 명확한 성격과 특징을 이야기하는 영상.
그 영상을 보니 생각이 빠르게 스쳐갔다. '남에게 지금의 나를 소개하게 된다면, 나는 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소개할 수 있을까'. 대답은 당연히 'NO'다. 직장인 10년 차, 나 자신을 점점 잃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직장인이 된 지도 벌써 10년. 정체성에 대한 위기가 찾아온 것 같이 느껴진다. 일을 할수록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나 자신을 스스로 잃어가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소 진부한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나를 갈아 넣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좋지 않은 느낌.
나는 본래 단순 반복적인 업무를 아주 아주 아주 x 100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그 열심을 회사에서 나름 인정받아온 것 같다. 단순 반복적인 업무라고 해서 '1+1=2'수준의 업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단순 반복적인 업무는 '정해진 틀이 있지만 많은 노력을 요하는 일'정도라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업무는 내가 잘하는 일과는성격이 좀 다르다. '기획'이라는 업무를 맡으며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그 새로움을 시장에 안정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수많은난관을 헤쳐나가야만한다. 지엽적이면서도 전체를 봐야 하는,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업무를 해나가야만 하는 그런 상황.
처음 기획업무를 맡았을 때는 내가 왜 이리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밤낮, 주말 할 것 없이 일이 내 삶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많은 업무량이 내 스트레스의 근원이고, 일의 양이 줄어들게 되면 나의 스트레스 또한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버텨왔다.
하지만 일이 그다지 많지 않으나 업무는 지속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요즘,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를 잃어가는 느낌에서 비롯되는 스트레는 나와는 맞지 않는 업무에서부터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데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틀 안에서 남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는데서 희열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회사일에 맞는 일, 안 맞는 일이 어디 있어. 그저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묵묵히 일하다 보면 회사에서 인정받고 승진하고, 그러는 거지'
분명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의 삶을 그런 맞기만 한 말에 맞추어 살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무언가를 얻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10년 동안의 직장생활에서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보다 더 바쁜 직무를 맡았던 적도 있었고, 최악의 인적구성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나 자신을 잃지 않고 나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갔다. 요즘은 강요받은 책임감과 맞지 않는 업무라는 악재가 겹친 '환장의 콜라보'가 나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렇게 징징대고 있지만, 직장인인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은 안다. 다만, 새로운 업무를 맡으며 나라는 사람을 다시 한번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회사에서의 적성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이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 다시 찾아온다면당당히 찢어 벗어던지겠다.
지난 6개월간 새로운 도전에 대한 찬양과 도전의 정수를 맛보라 하는 수많은 명언과 글귀, 유튜브 영상들을 보며 나 자신을 달래 왔다. 특히 월요일 출근길에는 항상 '명언 글귀'를 라디오처럼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더 이상 본능을 거스르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나 자신을 인정하고 열심히 노력만 하기로 하자. 적응 못하는 나의 모습에 자책하지 말고 이제라도 발견한 진정한 나 자신에게 '그럼에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라고 스스로 위로만 해주자.
나는 사이즈와 퍼스널 컬러가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음에도 남들에게 튀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