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아올라 Dec 09. 2023

[여기는 모스크바입니다.] 딸에게 화낸 날

사랑으로 용서해 주는 나의 요정, 고마워

 

2023.2.22

 큰 아이를 키우는 10년 동안 화를 낸 적이 있었던 가. 얼굴에 짜증을 머금고 예민하게 굴기도 했었고, 화가 나지만 꾸욱 참고 큰 숨을 들이 쉰 적은 있었을 것이다.

 어제저녁 처음으로 내 기억에 남을 유치한 어른의 태도, 화를 낸 밤으로 기억이 될 것 같다.


 물론 언성을 높이진 않았다. 수 백 권의 육아서가 그 정도쯤은 인내할 수 있게 나를 다듬어 놓았기에 다행히 그 길은 피했다. 화가 슬슬 올라오면 흠 하고 참아내곤 하는데 그걸 어제는 참지를 못하고 화로 둘둘 말은 잔소리 공격을 퍼부었다.

 

 아이는 놀랐다. 당황했고 슬펐을 것이다.


 발레 새 작품을 받아 연습하며 칭찬하고 또 칭찬했다. 신나서 연습을 멈추지 않는 아이에게 고쳐야 할 것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얘기해 주는데 갑자기

 “알았어!! 나 대게 못해. 하… 나 너무너무 못해. 됐지?”

이 말에 난 목에 걸렸던 화가 우두두두두 튀어나왔다.


 ”희야. 잘하는 것만 보고, 잘하는 것만 연습할 거면 레슨을 왜 가는 거야? 발레 작품 받고 싶다고 해서 방학 3일을 개인레슨 잡았고, 레슨 데려다주려고  온 가족이 한 시간 반을 가서 한 시간을 기다리고 또 한 시간 반을 집에 오고 이렇게 하는 건데, 잘하는 걸 계속하려고 다니는 게 아니잖아. 못하는 게 있으면 내가 이걸 못하는구나 인정하고 그걸 연습해야지 그걸 보는 게 왜 그렇게 힘든 건데. “


 사실 희는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 큰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완벽한 모습만 보이려는 게 또 그의 단점이다. 아픈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싫어하고, 90점도 잘한 것인데 어색하게 미리 선수를 친다. 나 90점이야, 그것도 엄청 잘한 거 맞지? 90점도 잘한 거지?


 어렸을 때부터 학습적인 결과가 참 빠르고 좋았다, 많이. 어딜 가도 1등이었고 무슨 시험을 봐도 1등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슬슬 보이는 문제가 못하는 건 아예 일찌감치 등을 돌려버린다.


 요 근래 러시아 학교로 옮기는 문제와 먼 일 같지만 대학 특례 문제까지 겹치면서 이 유능한 아이를 어떻게 길을 내어주어 방향을 잡아줘야 할지 고민과 두려움과 억울함과 예민함이 하루씩 돌아가며 버티고 있던 때였다. 한국 아이들은 하루에 2~3시간씩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학원을 다니며 입시 준비를 시작한 듯 보이는데 불안했다. 그럼면서도 어떻게 뭐를 하라 해야 할지 몰랐다. 스스로 공부를 찾아 하는 아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아직은 고학년이 아니니 괜찮겠지 라는 마음으로 발레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한 번의 거절도 없이 방학 3일 내내 발레 레슨을 잡아놨다. 그런데 못하는 것을 자꾸 반복하고 연습해서 스스로 터득했으면 좋겠는 나의 바람이 (아마도 학습적인 면에서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화로 바뀌었는가 보다. 잘하는 것만 해서는 러시아 학교에서 버틸 수가 없는데..  못하는 것도 끌고 가야 하는 입시에서 절대 이겨 낼 수 없는데.. 그 마음이 발레 연습 도중에 평소 딸의 염려되는 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난 꾸욱 쟁여두었던 잔소리 폭발을 한 것이다.


 입을 꾸욱 다물고 방에 들어가 빨래를 널고 있는데 딸이 방에 따라 들어오더니

 ”엄마, 내가 도와줄까? “라고 마음을 연다.

 속 좁고 마음의 그릇도 작고 화를 풀어낼 줄도 모르는 바보 같은 나는

 “아니.”라고 유치하게 대화를 끝내버린다. 유치한 것도 아니고 속이 좁아 혼자 화내고 혼자 풀지도 못하는 어리석음이었다.


 딸은 자기 방에 문을 쾅 닫고 들어가더니 잠시 후 나에게 와 편지를 건넸다. 그 순간 나는 딸을 안고 울었다.

내 속좁음에 화가 나서. 내 욕심이 부끄러워서. 내 유치함이 부끄러워서. 내 부족함이 미안해서.


 편지에는 엄마를 탓하는 말은 없었다. 안 고치려고 해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얼굴에 화가 잔뜩 담긴 이 엄마를 사랑한다고 두 번이나 쓰여있었다. 이 요정에게 엄만 대체 얼마나 부족한 것일까. 화를 화로 받지 않고 사랑으로 오히려 이 어른을 감싸주고 용서하는 이 요정은 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대단한 아이인 것일까.


 “희야 엄마가 잘못한 거야. 용서해 줘.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그냥 다 잘못한 거야. 이 작은 요정에게 화내서 미안해.” 우리는 같이 안고 울었다. 내 작은 마음이 많이 밉고 부끄러웠다.


 딸의 편지를 고이 접어 지갑에 넣어 두었다. 오늘부터 이 작은 편지는 나의 부적이 될 것이다. 나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오는 날 볼 것이고,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무심해지는 날 볼 것이고, 나도 모르게 욕심이 나는 날 볼 것이다. 이 아이들 없었음 나는 얼마나 부족한 채 작은 그릇으로 살아갔을까.


 나의 요정들. 너희 덕분에 엄마는 오늘도 배운다. 너희의 마음을. 너희가 생각하는 그 마음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고마워. 요정들. 고마워 정말.

작가의 이전글 [솜사탕말/딸] 숙녀의 당당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