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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27. 2021

당신이 잠든 사이에

코로나 판데믹에 일반인이 경험한 생명 전선의 밤


 이것은 내가 죽으려고 했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의료계 지식이 전혀 없는 일반인이며 이 글은 시사 글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더 마모되기 전에 기록을 남긴다. 그날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가감없이 기록할 생각이나, 시작하기에 앞서 당신이 그때의 내가 극심한 약물중독 환자였음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바로 옆 침상에서 잔디와 담쟁이 덩굴 풀이 자라는 것도 봤다.


 그곳은 집중치료실이었다. 나는 병원에 집중치료실이라는 시설이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것이 중환자실을 다르게 부르는 말이라는 건 더 나중에서야 알았다. 며칠 동안 어떤 사람도 현재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나는 눈을 뜨자마자 알았다. 커다란 문에 빨간색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모양과 같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내과계 집중치료실'

 병상은 네 개였다. 각 침대 위에 달린 커다란 모니터에서 환자의 바이탈이 수시로 표시되고 있었다. 젊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맞은편 침대에는 비쩍 마른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다. 내 오른쪽에 누운 할머니는 10분마다 죽을 것처럼 기침했다. 대각선 방향에도 침대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귀가 거의 먹은 할머님이 계셨다.

 그리고 나는 며칠 만에 그들의 이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거동이 가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변줄을 꽂은 채로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1분이 100년처럼 흐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날이 내 인생에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첫날에는 다른 환자와 대화도 하지 못했다. 할머니 한 분은 당초에 귀가 좋지 않아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했고 나머지는 대화고 나발이고 생각할 겨를 없이 아팠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24시간을 교대로 상주하며 간호를 봐주던 의료진 선생님들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는 해본 적이 없다. 짧은 질의응답에 가까웠던 것 같다.


"저를 제외하고는 전부 나이가 지긋하시네요. 젊은 사람은 이곳에 잘 오지 않습니까?"

"환자분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잘 오지 않으세요."


 나는 오래전부터 미디어 매체에서 의료진을 백의의 천사로 다루는 것을 봐왔다. 지나친 미화가 아니냐, 조금 더 존중을 갖자 혹은 아무렴 어떠냐는 분분한 의견들도 봐왔다. 내 개인적 경험으로는 집중치료실에서 만났던 그들을 천사 아닌 다른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지금 이 글을 읽던 몇 사람들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핏발을 세울 수도 있겠으나, 서론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럼 그곳이 천국이었느냐? 지옥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끔찍한 비명과 고통밖에 없는 지옥도에서 유일하게 나긋나긋했던 친절이다.

 내가 만난 선생님들은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이 정도로 상냥한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를 가졌다. 이제 와서 상기하자면 고통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그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로 보일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배제하며 의료업에 충실한 전문인이었다.


 선생님들은 젊은 나이인 나를 부를 때만 상냥한 말씨였다. 그곳의 평균 나이는 못 해도 85세. 대각선 할머니뿐만 아니라 모두 귀가 좋지 않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도 버럭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의료 지식 없는 본인도 의료인이 환자에게 처치하기 전에 고지를 해야만 한다는 상식이 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링거 바늘을 꽂거나 약을 투약하는 일은 없다. 그러니 상상을 해보시라. 24시간 집중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이곳이 얼마나 안정과는 거리가 멀고 시끄러울지. 중요한 것은 그것만이 최선이라는 사실이다.


"할머니! 식사! 하세요!"

"링거! 갈아드릴게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이틀째 되던 날, 나는 병원에서 부탁한 업무를 보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해야 했다. 병실 선생님들이 어두운색 옷을 입은 것에 반해 나의 이동을 도와주던 선생님은 형광 계열의 밝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에 단 둘이 가 머쓱해서 내가 한 마디 건넸다.


"목이 아프시겠어요. 선생님들이요. 환자분들이 전부 나이가 지긋하셔서 온종일 소리를 치시던데."

"그렇죠? 거기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전부 목이 쉬어있어요. 그런데 화를 낸다고 오해까지 받는답니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렇게까지 소리 내지 않으면 환자분들이 듣지를 못하는 건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이렇게 고된 일이 다 있나.


 재미있으려고 집중치료실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지만,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로 고통스러우며 지루하다. 팔다리에 군데군데 바늘이 꽂혀 마음대로 몸을 뒤척이거나 비틀어댈 수도 없다. 약 기운을 해독하면서 서서히 정신이 멀쩡해지기 시작하자 나는 며칠 만에 그곳에서 영영 미쳐버리는 줄로만 알았다. 나는 지독한 불면증 환자로 입원 기간 내내 1시간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종일 지독한 정신으로 깨어있다 보니 간간이 병실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뭐가 되었든 사람 말소리라면 흥미롭게 듣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하루 세 번 교대하는데, 교대할 때마다 책상 뒤 비좁은 공간에 웅크려 앉아 40분 가까이 되는 인수인계를 했다. 그들에게 나는 1번, 옆 할머니는 2번. 할아버지는 3번. 이름을 부르는 일 없이 환자를 칭하며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의학 용어로만 여덟 시간의 업무를 보고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엿듣는 것만이 입원 생활의 쏠쏠한 재미였다.


"간호사! 충전기! 충전기! 아내한테 전화 해야 해!"


 어느 오후에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고함을 치며 부탁을 했다. 이렇게나 길게 입원하게 될 줄 몰라서 핸드폰 충전기를 챙겨오지 못하셨다고 했다. 선생님은 크게 당황하다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혹시 충전기를 빌려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하셨다. 나는 흔쾌히 빌려줬지만 사용하는 기종이 달라 결과적으로 할아버지를 돕진 못했다. 하지만 그를 기점으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내가 여기에 들어온 게 2주인데 이제는 살이 다 빠져서 가죽밖에 안 남았어."


 자조적으로 말하며 흐흐 웃는 할아버지 얼굴은 아주 시커멨다. 햇빛을 받아 건강하게 탄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생기 없이 거무죽죽했고 뺨과 눈두덩이가 움푹 꺼져서 마치 해골처럼 보였다.

 할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실제로 한 번 죽었다가 (그렇게 말씀하셨다) 심장 재세동기로 간신히 목숨만 붙어 오셨다고 했다. 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입원한 날이 바로 할아버지의 퇴원 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퇴원이 취소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상 증세로 언제 퇴원할 수 있을지도 모를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시간이 갈수록 말수도 기운도 없어지셨다.

 어쩌다 말이 붙으면 하염없이 그러셨다. "나는 오늘 내일로 나가는 줄로만 알구 있었는데..."

때는 하필이면 코로나바이러스가 4단계로 격상한 시점이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던 난 마음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슬픔에 잠기고 만다. 아이고. 나도 요양 병원 계신 우리 할머니, 코로나 때문에 임종 못 지킬까 봐 겁나서 죽겠는데 이 사람들은 오죽할까.

 사랑하는 가족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난데없이 죽음을 앞에 둔 기분은 얼마나 참담할까.


 "어이구. 우리 할머니. 식사하셔야지 빨리 낫지. 밥도 한 숟가락 안 뜨시면 어떡해. 국에 밥 비벼서 떠드릴 테니까 이것만 드셔요. 한 입만 더 먹자. 할머니. 한 입만 더 드시자."


 식사 시간, 옆 침상에서 일어난 소란에 나는 몸을 일으키고 그쪽을 보았다. 저 할머니. 나 입원했던 날에는 조금 드셨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식사를 거부하신다. 할머니는 팔십 대 초반의 나이로 보였는데 머리는 하얗고 얼굴은 반질반질하셨다. 그런데 하는 이야기를 듣자니 올해로 나이가 96세이시란다. 아들이 무려 칠순이라고.

 나는 친할머니 생각에 식사 시간마다 할머니를 조르기 시작했다.


"할머니! 식사하셔야죠! 아침도 제대로 안 드셨잖아."

"안 먹을래. 입맛이 없어."

"할머니! 안 먹으면 제가 속상해요. 저 할머니 손녀 같지 않아요? 저를 손녀라고 생각해서라도 식사 맛있게 해주셔요."


 할머니는 손녀 이야기에 까르르 웃더니만 나를 보고 그러셨다. "아이구. 꼭 우리 막내딸 같으네." 할머니 막내딸이 젊을 때 나처럼 갸름하니 예뻤다고 좋아하셨다. 할머니는 큰아들한테 자기가 짐이 되는 것 같다고 밥도 먹기 싫고 뭣도 하기 싫다고 맨날 시위했는데 때마다 내가 할머니를 위로했다.

 할머니는 선생님들한테 받은 커피 사탕을 나한테 몰래 나눠주시기도 하면서 나를 예뻐했다. 침대와 침대의 사이가 멀어서 할머니는 사탕을 나한테 냅다 던져서 주셨는데, 그때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할머니는 겁이 많으셨다. 살면서 병원에 온 것이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할머니. 96년을 살면서 병원 올 일이 두 번밖에 없었으면 그것만큼 복된 일이 어디에 있어요?" 내 말에 할머니가 젊은 시절에 신발장이 쓰러져서 그 밑에 깔려 팔가죽이 다 까졌다고 하면서 팔을 내밀었다. 팔의 바깥쪽 안쪽 색이 달랐다. 그러고 나서 계속 건강했는데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할머니는 폐에 문제가 심각하셨다. 종일 기침을 하며 가래가 끓어 숨도 제대로 쉬질 못했다.

할머니의 큰아들은 할머니의 치료 중단을 원했다. 더 알아볼 것 없이 중단하길 원했다. 간호사로 오래 일한 할머니의 며늘아기는 따로 병원에 연락해서 최선을 알아보려 노력했다.

 할머니는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 집에 가서 가족을 보고 싶어 했다.


 할머니의 CT를 아들이 허락하지 않아서 선생님들이 종일 그 이야기로 고민한 적도 있다. 할머니가 왜 식사까지 거부하면서 자신을 짐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알 것만 같았다. 선생님들은 다른 가족들에게 연락해 어떻게든 동의를 구해냈고 할머니는 새벽 3시경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결과가 정말 좋지 않았다. 아무리 전문 용어를 몰라도 말의 흐름 정도는 파악할 수 있잖은가. 선생님이 교대할 때 슬쩍 들은 이야기로는 "검사 결과로 ...도 있고, ...도 있어 보이고. ...도 있는 것 같고. 월요일에 교수님이 보셔야 제대로 알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대각선 할머니와는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질 못했다. 할머니 귀가 워낙 좋지 않아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 할머니는 동화에 나오는 요술 할머니같이 귀여운 생김새였고, 말투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말꼬리를 높이는 버릇이 있어서 말씀하시는 게 정말 깜찍했다.


"할머니. 치매약 챙겨 드셔야죠."

"저가 치매인거에요오?"


 할머니의 물음에 선생님들은 곤란해했다. 내가 듣기론, 할머니가 치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는 요양 병원에서 이쪽으로 건너온 입장이고, 요양 병원에서는 어쨌든 치매 약을 베이스로 깔고 들어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을 할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고, 불쌍하고 귀여운 우리 할머니는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계속 "제가 치매에요오?" 하고 물었다.


 내가 퇴원하기 전날의 밤에 나는 여전히 잘 수 없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뒤척이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두 시간 내내 흐느끼고 있으니 선생님이 모르는 체를 해주다가 옆으로 다가와 등을 토닥여주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대답을 하지 않자 선생님은 조용히 물러났다. 우리의 공간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지만, 선생님은 없는 사람처럼 고요하게 자리를 지켰다. 나는 수액 팩을 동시에 세 개나 맞았어야 했는데 혈관 통이 심했다. 불면으로 잠을 못 이루는 것도 죽겠는데 팔과 다리가 아파죽겠으니 슬프고 힘들어 뛰쳐 나가고만 싶었다. 너무 아파하면 선생님이 바늘의 위치를 바꿔주는데,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치워서 더는 찌를 곳이 없어 곤란한 처지였다. 위치 교체를 요구하자 선생님이 링거 바늘을 빼주었다.

 그리고 이따가 다시 와서 놓아주겠다고 했다.


 몇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히던 혈관 통에서 자유로워지자 저도 모르게 잠이 쏟아졌다.


 선생님은 내가 간신히 잠든 것을 알고 두 시간 동안은 다가오지 않았다. 은근슬쩍 눈 붙이는 것을 도와준 것이다. 얼마나 죄송하고 감사하던지. 이러니 내가 어떻게 천사가 아닌 다른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조금이나마 잠들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매일 새벽 4시에 심전도 검사를 받는다. 그리고 동맥에서 피를 뽑는다. 뉴스 기사나 책, 영화에서 병원의 불은 24시간 꺼지지 않는다고 봐왔던 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나니 가슴이 벅찼다.

 나는 평생 불면증을 증오하고 살았지만, 지금은 불면으로 그들의 밤을 본 것이 최고의 행운처럼 느껴진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수백 명의 사람들.

"선생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하는 나의 질문을 생경하게 받아들이며 쑥스러워하던 사람들.

당신이 잠든 사이에, 판데믹으로 어느 때보다 외로운 환자들의 밤을 지키는 사람들.


 내가 퇴원을 하던 날에도 할머니는 아침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 이제 퇴원해서 할머니 못 보는데, 할머니 식사 제대로 안 하는 것 보고 가면 속상해요. 마지막으로 잘 먹는 거 보여주세요. 저 없어도 잘 드셔야만 해요. 약속이에요."

 내 설득에 할머니는 처음으로 밥그릇을 다 비웠다.


 환자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몸에 붙어있던 장치들을 떼어내며 집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별안간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요양원 계시는 우리 할머니, 망할 코로나 때문에 얼굴 못 본 지도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실까. 여기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손주 손녀처럼 위로라도 해드렸는데, 우리 할머니는 누가 위로해주나. 나 떠나면 여기 사람들은 외로워서 이제 어떻게 하나.

 결국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손 소독 철저히 방역하는 조건으로 할머님 손 한 번만 잡게 해달라고 했다. 선생님들은 내 마음을 알았는지 허락을 해주셨고, 나는 떠나기 전에 할머니 손 한번 꼭 잡고, 안아드리며 손주의 마음으로 말했다.


"할머니 가족들도, 할머니 보러 오고 싶은데 코로나 때문에 못 오는 거예요. 올 수 있었다면 분명히 저처럼 할머니 사랑한다 했을 거예요. 할머니 사랑해요."

"어이구. 고마워요. 고마워요..."


침대에 돌아와 숨죽여 울었다. 우리 할머니 귀먹어서 나 우는 소리도 제대로 못 들어 다행이라면서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짐을 챙겨 떠나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할머니! 할아버지! 제가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금방 나아서 쫓아오세요. 먼저 가서 있을게요.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시고 빨리 건강해지셔서 뛰어 내려오세요. 기다릴게요."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들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밝게 웃으셨다. 그러면서 이제 본인은 몸이 아파서 못 쫓아간다 이야기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으니 기다리겠다고 했다.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도, 다른 선생님들도 내가 하는 소리를 듣고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우리 친할머니 있는 곳에도 선생님같이 좋은 분들이 계시겠죠?"

"그럼요. 당연하죠. 거기에도 있을 거예요."


 나는 이따금 병원에서 만났던 그 얼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직도 그곳에서 나와의 약속을, 가족과 만남을 되새기고 있을까. 더욱 비참한 것은 어쨌든 그들이 건강으로 퇴원하지 않고서야 가족과 다시 만나지 못했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판데믹이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만 한다.

무수한 밤을 홀로 기약 없이 목매어 지새는 환자들과 그들 곁을 지키는 의료인들.

판데믹 아래 가장 외롭고 슬픈 생명 전선.


 나는 당신은 우리는 이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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