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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Nov 17. 2023

수능의 추억

빨간 도시락과 순댓국

수능을 본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간다. 내가 치른  대입수학능력시험과 어제의 수능이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해서 EBS 사이트에 접속하니 친절하게도 문제와 정답지가 올라와 있다.


국어부터 쭉 훑어보니 무려 20페이지나 된다. 지문의 길이는 조금 짧아진 것도 같은데 쪽수가 장난이 아니다. 수학은 1번 정도만 풀 수 있고 나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가 이런 것을 공부했었나 하는 기분이 든다.

영어는 듣기 평가 문제 자체가 길다. 비교적 듣기 평가 문제는 짧았던 것 같은데 뭐든 지문 길이가 길다. 그나마 괜찮은 것은 한국사 시험이었다. 총 20문제가 작년 5학년 2학기 국사 가르쳤던 내용과 겹쳐서 천천히 풀면 풀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수능을 치른 학생들과 부모님들은 어제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내 마른 날씨였다가 하필 어제 오후엔 비가 쏟아져서 퇴근길에 옷이 다 젖어버려 불평했는데 참 한가로운 불평이었다. 고3 학부모님들은 수험장 밖에서 우산을 들고 겨울비가 몸을 다 적셔도 추운 줄 모르고 기다리고 있었을까?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수능날의 기억은  흐릿한데 묘하게 색이 선명하다.

아직 해가 뜨기 전에 벌써 준비를 다 마치고 시험을 보는 학교에 도착했다. 그날 아침은 오고 가는 말도 없었는데 많은 말을 한 것 같았다. 전날 푹 잤고 아침엔 엄마가 끓여준 따뜻한 국과 밥을 든든히 먹었다. 보온도시락엔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 장조림이 들어있었다. 그때 싸간 빨간 도시락은 중학교 때 항상 들고 다녔던 것이었다.

 아빠의 트럭을 타고 시험장에 들어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다. 조용히 고사장에 들어가 앉아서 제 자리를 확인하고 수험표 등을 확인했던 것 같다.  그리고 1교시 2교시 치른 후 점심을 먹었다. 같이 먹었던 친구가 기억난다. 고사실이 좀 떨어져 있었는데도 내가 있던 교실까지 찾아와 같이 밥을 먹었다. 시험 내용을 이야기하며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냥 밥을 먹었던 것 같다. 3교시 영어는 조금 졸린 채 시험을 봤다. 4교시 사탐은 4과목을 정신없이 문제를 읽었었고 5교시 제2외국어는 중국어였는데 거의 찍다시피 시험을 끝내고 엎드려있었다. 마지막 종이 울리기 기다리면서...


나가는 길은 참 멀었다. 계단을 내려오니 벌써 바깥은 어둑어둑했다. 아이들이 계단에 꽉 차서 와글와글 거리며 빠르게 지나가는데 나는 가능한 천천히 걸었다. 분명 시험은 끝났는데 아직 또 하나의 시험이 남은 것 같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맞았다.

수능이 끝나면 모든 게 달라질 줄 알았는데 그냥 하나의 시험을 본 것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시험 하나에 내 인생이 걸렸다는 것이 (그때엔) 너무 아쉬웠다.


고등학교 내신이 좋았지만(매우) 수시는 성균관대 하나만 넣었다. 수시를 보러 가던 기억도 선명하다. 엄마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둘만 했던 여행이 수시를 보러 서울에 갔던 일이었으니까.

혜화동 노란 은행나무 길이 선하다.


누군가에게는 후련했을 그 짧은 길이 나에게는 왠지 또다시 어디론가 이어질 것 같아 서두르기 싫어 천천히 나갔던 것 같다. 학생들이 많이 빠져 조금 한산해질 때까지 천천히 걷고 있었다. 고3인데도 그때까지 핸드폰이 없었던 나는 교문이 보이고 나서야 아빠한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때 엄마가 교문 앞에 보였다.

아빠 트럭의 주황색  전조등이 반짝였고 그 앞에 서있는 엄마가 보였다.

그저 지친 상태였는데 저기 서 있는 사람이 우리 엄마라는 확신이 들자 눈물이 났다.  시험을 그렇게 망친 느낌도 아니었고 기운이 조금 없었을 뿐인데 엄마를 보니 떨어지는 낙엽처럼 눈물이 났다. 잔뜩 울상을 하고 엄마 앞에 가니 별말씀 없이 도시락가방을 들어줬고 같이 차에 탔다. 따뜻하게 안아준다거나 수고했다는 말도 없었지만 학생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시험장 앞에서 나를 기다린 엄마의 붉어진 얼굴에 묘하게 안도했다.


차에는 아빠, 동생까지 이미 다 있었다. 집 근처 자주 가던 순댓국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피순대로 유명한 순댓국집이었는데 국밥을 앞에 받자 허기가 밀려들어와서 배부르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인터넷에서 수능 정답을 확인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채점을 같이 했다.


겨우 몇 문제 더 맞고 못 맞고의 차이지 그 시간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학생들은 누구나 격려받아야 한다.

나에게 격려는 나를 끝까지 기다려준 엄마와 가족들. 그리고 순댓국이었는데.

이 추운 가을의 끝, 겨울의 시작에서 시험을 보고 또 다른 인생으로 들어서는 학생들에게 어제의 시험이 흐린 기억은 아니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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