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옥포대첩기념축제 백일장 출품작
선생님!
어색한 장소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났을 때 그리 놀라지 않은 이유는 그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이 둘을 데리고 사생대회에 참가하려고 갖가지 화구들을 바리바리 챙겨서 언덕까지 오르는 길이 마냥 설레지만은 않았다.
무거운 짐을 내리고 기어이 흐른 땀방울을 식히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가 당황스럽기도 했다. 가까운 쪽에서 어느 큰, 교실에서 학생으로 만났던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자란 그 아이가 서있었다. 5학년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만난 인연이 몇 년을 지나 거제 옥포대첩 백일장 대회장에서 만난 것이다. 중학생이 된 그 녀석은 친구들과 함께였고 여전히 성실한 얼굴과 부끄러워하는 특유의 미소로 나를 불렀다.
5학년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제일 관심 있게 열정을 두며 임한 과목은 사회였다.
2학기 사회는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극도로 압축하여 최소한의 소양만을 갖출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입바른 소리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으레 말하던 사람들이 초등 5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를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중요한 내용만 핵심 약하듯 간추려놓은 교과서에 실망하고, 이렇게는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새롭게 자료도 만들어가며 수업을 했었다.
부끄럽지 않은 수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교사의 진심을 아이는 고스란히 흡수했고 수업 내용 너머의 역사에 다가가기 위해 질문했다.
역사를 바로 사람도 드물지만, 일본과 우리와의 관계를 감정을 뛰어넘어 사실과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립은 일상생활에서 만나기 어렵다.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수업 중 일본과의 대립이 극명한 임진왜란에서 일제강점기, 최근의 위안부 할머니를 수업할 땐 흥분과 비난일색의 언사가 가득했다.
40분의 수업 시간이 모자라서 항상 아쉬워하며 수업을 마무리했을 때 아이 역시 얼굴에 수많은 감정을 얹고 새롭게 안 사실에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수업을 제대로 한 사람과 잘 배운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전율을 우리는 공감했었다.
학년이 끝나고 종업식 날, 아이 준 편지에는 "선생님이랑 한 역사 수업이 제일 재밌었어요." 단순하지만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바로 그 아이가 시간을 뛰어넘었어도 조선수군이 일본을 이기고 첫 승리를 거둔 바다는 살아 숨 쉬는 이곳에 와서 역사에 대한 글을 쓰러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극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본은 좋고 싫은 양가감정을 뛰어넘는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매우 오랜 기간 승자였고 선구자였다. 그 왜구라고 무시하고 천시했던 대상에게, 무력으로 제압당하고 전국토를 유린당했으며 비루한 삶이라도 이어가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생을 강제로 빼앗겨야 했던 임진왜란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굴욕의 장면이다.
그 이후 일본과의 관계는 극도로 기울어진 저울처럼 경제, 문화, 역사, 정치까지 아무런 힘을 쓰기 힘든 상황이 이어졌고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기장 힘든 부분이었다.
사과하지 않는 그들에게,
인정하지 않는 그들에게 아무리 외치고 문을 두드려도 돌아보지 않는 진정한 뉘우침과 반성 때문에 힘들었던 긴 날 속에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았다.
일제가 최고라 말했던 산업 여러 분야에서 우리는 그들을 따돌렸다.
일본 만화와 영화, 음악까지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 시기를 넘어 우리의 문화가 그들을 열광하게 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진 엔 환율 때문에 제주도보다 저렴하다며 일본 여행을 다니고, 잃어버린 30년이라 그들이 한탄하는 그 시기동안 우리는 눈부시게 발전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적 발전보다 안에서 느끼는 진정한 해소는 더 느리다.
현충일 오전, 꿀처럼 달콤한 휴일에 많은 아이들이 그들을 응원하는 가족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러 옥포대첩기념공원에 모였다. 수준이나 연령을 뛰어넘어 이곳에 모인 아이들은 최소한 자신이 쓰고 그린장면은 평생 가슴에 남길 것이다.
극일, 일본을 이기고 뛰어넘는 것.
일본에 첫승을 거둔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역사를 쓰는 모든 이들이 극일을 실천한다.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사실을 직시하는 눈을 갖게 하는 일도 극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어갈 때 조금 더 옳은 방향으로 그 길을 잃고 살아온 날들을 감사해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것도 극일이다.
나를 부르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찾기 어려웠다. 중학생 주제가 난중일기, 승전의 깃발이니 임진왜란에 대해 쓰고 갔을 것이다. 그 아이가 글을 쓸 때 예전 5학년 때 배운 역사 수업이 기억났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 아이의 글 속에서 옅은 숨결처럼 묻어나는 것이 올바른 생각이길 바랄 뿐이다.
잘 가르친 학생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나의 극일이다.
- 백일장 장원 탔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