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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리어가드너 Apr 08. 2024

남의 신을 신고 걷기

진로에 대한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시리즈

                                     어린 시절, '넌 커서 뭐가 될래?'라는 막막한 질문에 

                   ‘똑똑하고 훌륭하고 멋진 사람요’라고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단어를 남발했었고, 

                                                                                

                         초등학교 때, '넌 다른 사람보다 뭘 잘하니?'라는 재능을 묻는 질문에

                                 ‘달리기요’라는 잡기(雜技)로 답해 운동선수가 됐었고, 


                          십 대 중 · 후반쯤, '넌 반에서 몇 등 하니?'라는 지능을 묻는 질문에 

                                 ‘머리보다는 몸을 쓰는 직업’을 심각하게 고민했었고, 


                           대학교 졸업 때쯤, '넌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할 거니?'라는 질문에 

                         ‘과연 밥은 벌어먹고살 수는 있을까’하고 현실에 처절히 비관했었다.     


우리는 진로에 대한 대답을 강요받는 사회 속에서 마치 질문자가 원하는 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암묵적인 압박과 강요 속에서 살고 있다. 과연 ‘나에게 꿈은 있었을까?’. 현실에 치어 꿈을 잃어버린 ‘그저 그런 어른’이 된 지금, ‘하고 싶은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없다는 꿈과 직업의 불일치 공식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몇 해 전, 종영한 tvN 드라마 나빌레라(나비일레라의 준말=나비로구나)는 사랑이야기 하나 없이 세대 간의 교류, 가족관의 관계, 모두를 아우르며, 나이나 노화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 ‘늙음’에 대해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실패와 좌절 앞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소위 말하는 ‘꼰대’처럼 지적하거나 충고하지도 않는다. ‘다 잘 될 거야’라는 겉치레 같은 낙관으로 희망 고문을 하지도 않으며, 어른으로서의 시대적 책임에 대해서도 묻지도 않는다. 젊은 발레리노 채록과의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통해 일방적으로 돌봄을 받거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수동적인 노인의 초라한 모습이 아닌 지혜롭고 따뜻한 멘토로서의 노인을 보여준다(마치 상담사(채록)와 내담자(덕출)의 역할연기를 보는 듯...).      


중년의 시기에 사람들은 인생에 대하여삶에 대하여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영원한 것에 대하여 이성적인 작업보다 이것을 뛰어넘어 청년기에 간과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75세 노인(심덕출)은 평생 가족에게 헌신하며 우편배달원으로 은퇴 후 어릴 적 꿈이었던 발레리노로서의 날아오르고 싶은 꿈을 꺼내 든다. 노인은 발레를 하기에 너무 늦었다는 편견을 깨고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 속에서 흘리는 굵은 땀방울이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기’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노인은 무기력하게 자기 연민에만 빠져 있지 않는다. 마치 새로운 출발선에 들어선 사람처럼 다시 숨을 고르고 누구의 아들, 아버지, 남편 등으로 수없이 역할 지어진 자신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비로소 시작한다. 노인은 과거 시도해 보지 못했던 것의 아쉬움보다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의 진행상 기억되지 못하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본인이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     



scene 1.

승주 : 발레가 왜 하고 싶으세요?

덕출 : 저는 한 번도 하고 싶은 걸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먹고사느라, 처자식 건사하느라,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당연했고요.

         ... 저도 잘 알아요제가 늙고 힘없는 노인이라는 걸그래도 하고 싶어요.

         져도 좋으니까 시작이라도 해보고 싶어요.     




scene 2.

채록 :... 무용수가 되기에 너무 늦었다는 거, 알고 있죠?

        그런데 발레가 왜 하고 싶어요?

덕출 : 죽기 전에 나도한 번은 날아오르고 싶어서...     




scene 3.

채록 : 할아버지, 할머니가 끝까지 반대하면 어떡할 거예요?

덕출 : 그럼 몰래 해야지... 채록아, 내가 살아보니까 삶은 딱 한 번이더라, 두 번은 아니야.

         내가 아홉 살 때 아버님이 반대를 하셨고, 지금은 집사람이 싫어하는데

         솔직히 반대하는 건 별로 안 무서워.

         내가 진짜 무서운 건하고 싶은데 못하는 상황이 오거나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상황인 거지.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

         할 수 있을 때 망설이지 않으려고끝까지 한 번 해보려고.               






사람은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게 될 때, 그리고 나이가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러한 사실을 겸허히 수용하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가 있다는 말이 있다. 현재 중년의 시기에서 나이를 핑계로 포기하거나 미뤄뒀던 것, 내가 꿈꾸었던 것은 무엇이고 장애만큼이나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나이 듦’, ‘늙음’에 대해 ‘나도 멋지게 늙고 싶다’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과거 젊음의 환상에 고착되어 머무르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주인공이 겪고 있는 은퇴, 노화, 알츠하이머라는 소재는 사회문화적 환경 안에서 노인을 불쌍하거나 짐스러운 존재가 아닌, 서글프지만 늙음을 시간에 따라 발효가 되어 가는 것에서 전혀 서글프게 보이지 않는다. 극 중 발레를 가르치는 스물셋 방황하는 발레리노 채록은 발레라는 기술뿐만 아닌 덕출이 꿈꾸는 발레를 완성시켜 비상해 나가는데 옆에서 묵묵히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 나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상담자', 내가 닮고 싶은 상담사의 모습이 보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발달과정 속에서 불가피하게 거쳐야 하는 인생의 단계이자 자연스러운 변화 속에서 누구나 심리적 위기 및 전환의 시기를 갖게 된다. ‘남의 신을 신고 걸어본다'의 어원적 의미인 '공감'과 꿈에 대해 온 마음으로 ‘용기’를 전하려던 메시지의 여운에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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