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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Oct 23. 2016

미디어 매체의 프레임에 대한 짧은 생각

우리가 지나치는 소소하지만 강력한 인식의 틀

몇 해 전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끈 드라마가 있다. 이름은 <한자와 나오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그 드라마는 사랑싸움 일색인 기존 드라마와 확연히 달랐다. 그 드라마의 배경은 은행이었다. 은행원들의 사내 정치와 부조리한 권력 집단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분노를 느꼈다. 무언가 우리가 직면한 오늘날 한국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 싸워나가는 주인공에게 묘한 동질감과 응원의 감정을 가지게 됐다. 그렇게 참으로 오랜만에 몰두해가며 시청할만한 드라마를 만났다. 그만큼 혼자 보기 아까웠다. 그래서 어느 날 여자 친구와 함께 보기를 청했다. 물론 그때까지 드라마가 싸움을 만들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 드라마를 보면서 어떠한 문제점도 느끼지 못하는 거야?!”     


여자 친구는 드라마를 한 편 함께 보고, 화가 나있었다. 드라마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의외의 반응에 나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답을 내놨다. 


“왜 저기 주인공은 죄다 남자이고, 여자라고는 퇴근하는 남편 먹을 된장국 끓여주는 게 다인데?”


말문이 막혔다. 드라마를 보며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한 방 제대로 맞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했다고 해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만한 부분이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나의 생각을 말했다. “어느 정도 현실에 기반한 드라마인 점을 감안했을 때, 현실 속에 실제 임원층에 있는 사람들은 남자가 다수이니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반영한 게 아닐까.” “실제로 여성 임원이 적은 게 현실인데, 여성 임원들끼리 권력 다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우리가 드라마에 이처럼 집중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현실에 존재하는 역할 비중의 차이는 인정하면서도, 미디어가 그러한 성역할을 고착화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 인식을 전혀 갖지 못한 나에 대한 서운함과 답답함을 토로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오랜만에 즐거운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꿀 같은 휴식 시간들이 격정의 토론장으로 변모할 줄이야.


내 여자 친구는 페미니스트다. 그녀는 대학에 다닐 때 여성학 수업을 즐겨 들었다. 사실 나 또한 여성학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지만 보통의 교양 과목처럼 지금은 기억나는 게 없다. 부끄럽지만 현실이다. 그래서 여성학을 수강했음에도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여자 친구가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도 무감각했다. 잘 알지 못했고, 또 무언가 배우는 것은 막연히 좋은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녀를 응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페미니즘은 참으로 어려웠다. 재밌는 드라마에서도 비판의 시선을 견지해야 할 정도로, 항상 긴장(?)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난 드라마를 보며 문제제기를 하는 그녀가 조금은 지나치다고 생각했었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겠지만, 분명한 건 이 사회 내에서 통용되기엔 너무 많은 장벽이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기도 했다. 드라마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나 사이에 세워진 견고한 그날의 장벽은 그런 내 해석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여자 친구가 무엇에 화를 냈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미디어가 사회상을 반영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감안해서 콘텐츠를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역할을 폭넓게 바라본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무감각하게도 미디어라는 거대 매체가 형성한 프레임에 노출돼 있다.


비단 페미니즘이나 여성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다문화 이주민에 대한 프레임이 있다. 현재 한국 사회 내 외국인 중 다수를 차지하는 동남아인들도 한국 방송 콘텐츠에서 일관되고 왜곡된 이미지로 그려지는 게 현실이다. <9시 뉴스>에선 불법체류와 같은 단어와 함께 언급되기 일쑤이며, <개그콘서트>에선 몇 해 전 어눌한 한국말로 임금 착취당하는 것을 웃음을 위한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다문화 고부열전> 같은 교양 프로그램에선 이주 여성들이 하나같이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 불쌍한 처지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시사교양, 예능 할 것 없이 모든 콘텐츠에서 대중들은 동남아 이민자들을 당당한 삶의 주체로 인식하지 않고, 도움과 동정이 필요한 약자로서만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왜곡된 프레임은 그들을 동등한 이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게 했다. 그것이 다문화 사회 정착을 가로막고 있다.     


다문화 이주민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디어는 여성, 노인 등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해 왜곡되거나 고착화된 프레임을 형성해오고 있다. 과연 미디어는 이러한 약자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자와 나오키>에 대한 여자 친구의 질문은 여기에 닿아있었던 것이다.


최근 프랑스 공영방송 텔레비지옹은 흑인 앵커를 최초로 발탁했다. 그리고 영국 BBC는 3명 이상의 아동이 출연할 때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유색인종을 출연토록 규정을 정비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간 백인이 출연자 중 절대다수를 차지해, 유색인종은 주류에 편입할 수 없다는 잘못된 ‘프레임’을 형성한 것에 대한 반성에 기초하고 있다. 미디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 콘텐츠를 수정하는 것이다. 우리들도 (비록 페미니스트는 아닐지라도) 미디어 콘텐츠가 형성하는 프레임 중에 시정돼야 할 부분은 없는지 수시로 모니터링 할 필요가 있다. 가장 무서운 건 미디어 프레임에 본인이 노출돼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아닐까. 프레임을 인식하는 것은 보다 주체적인 사고를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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