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르네상스'는 이제 케이팝 팬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한 용어다. '감히' 말해, 2022년은 2009년을 연상시키는 확실한 걸그룹 부흥의 해였다. 에스파, 아이브, 르세라핌, 뉴진스 등 차세대 걸그룹들은 음반, 음원 모두에서 크게 약진하며 '걸그룹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다. 바야흐로 걸그룹 밀리언셀러 앨범이 등장하고, 차트 1위부터 10위를 모두 걸그룹이 점령하는 시대다.
https://n.news.naver.com/entertain/article/396/0000622685
이문원 문화평론가는 원인을 '코로나19 이후 팬덤 구도에 적응한 대중'에서 찾는다. 즉, 스마트폰 체류 시간이 증가하며 대중이 SNS에서 팬덤을 확장하는 업계 질서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SNS를 매개로 한 팬덤확장 전략과 더불어 각 그룹의 음악 및 컨셉 차별화 전략이 더해져 '팬덤형 아이돌' 모델이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결과가 지금의 '걸그룹 르네상스'를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리다. 하지만 이는 일견 일리는 있으나 불완전한 주장이다. 변모한 대중의 소비패턴이 왜 하필 걸그룹의 성장 요인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이그룹이라고 다르지 않았겠는가? 에스파, 뉴진스, 르세라핌, 아이브가 뚜렷한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듯이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엔하이픈, TEMPEST, TNX도 팬덤 확보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왜 이들은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못하고 있는가?
이 지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근 2년새 폭발적으로 성장한 숏클립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틱톡보다 대중적인 플랫폼인 유튜브, 인스타그램에서 제공하는 숏츠와 릴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숏클립은 보이그룹보다 걸그룹에 꽤나 유리한 플랫폼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숏클립은 대중이 걸그룹 콘텐츠에 노출되는 빈도를 증가시켰다. 걸그룹은 보이그룹에 비해 훨씬 대중성이 높아 SNS에서 일반 대중의 검색 비율이 높다. 팬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를 소비하기보다는 단순히 노래를 들으러,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러 아티스트를 검색하는 비율이 걸그룹이 월등히 높다는 의미다. 이때 숏츠, 릴스는 더 많은 이들을 훨씬 쉽고 빠르게 걸그룹 콘텐츠에 노출시켰다. 여기에 단시간에 아티스트의 매력을 확실히 보여주는 숏클립의 장점이 더해져 대중은 더욱 빠르게 팬덤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단순히 뮤직비디오를 보러온 일반 대중이 우연히 무대 영상을 편집해서 만든 숏츠를 보게 되고, 이후 스와이핑을 통해 보다 '효율적으로' 걸그룹 콘텐츠를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걸그룹은 숏클립이 선도하는 댄스챌린지에 최적화되어 있다. 고난도 안무를 선보이는 보이그룹에 비해 걸그룹 안무는 더 쉽고 중독성이 강한 편이다. 실제로 틱톡에서 걸그룹 댄스챌린지의 조회수는 보이그룹에 비해 훨씬 더 높다. 나연은 'Pop' 댄스챌린지로 무려 틱톡에서 15억뷰를 기록했고, 르세라핌 (4억8천만), 아이브 (3억9천만), ITZY (3억 9천만) 역시 올해 비슷한 시기 컴백한 보이그룹 세븐틴 (3억3천만), 엔하이픈 (8천만) 에 비해 괄목할 성과를 냈다.이러한 대중성 때문에 걸그룹은 보다 효율적으로 댄스챌린지를 통해 대중에게 안무를 보급할 수 있었다.
JYP의 트와이스와 ITZY는 가장 적극적으로 댄스챌린지를 활용하는 그룹이다. 아예 제작시기부터 댄스챌린지에 적합한 안무를 기획하며, 다른 그룹에 비해 댄스챌린지 관련 콘텐츠도 많고 다양한 편이다. 트와이스와 ITZY는 앨범 발매 직후 챌린지 참여를 독려하는 인터뷰 콘텐츠로 댄스챌린지 프로모션을 시작한다. 이후 아이돌은 물론이고 여러 예능인, 일반인과 함께 촬영한 댄스 영상을 업로드하는데, 그 콘텐츠의 양이 에스파, 뉴진스, 아이브 등 경쟁 그룹에 비해 월등히 많다.
가장 특기할 만한 사례는 나연의 'Pop' 댄스 챌린지다. 손동작 안무가 유난히 강조된 곡으로 컴백한 나연은 스타일리스트, 스태프 등 일반인들과 함께 촬영한 댄스 영상, 앉아서 하는 댄스 챌린지 등으로 너른 대중의 참여를 유도했다. 기타 걸그룹이 아이돌, 유명인들과 함께 댄스 챌린지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과는 구별되는 사례다. 이러한 전략은 중독성 강한 안무를 더욱 널리 퍼뜨릴 수 있었고, 그 결과 나연의 'Pop' 안무는 올해 가장 히트한 걸그룹 안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걸그룹 르네상스'에는 분명히 수많은 요인들이 존재한다. 주된 이유는 에스파를 필두로 '4세대 걸그룹'이라는 용어가 굳어지며 대형 기획사에서 데뷔한 완성도 높은 걸그룹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거대한 팬덤을 거느렸던 아이즈원이 해체하면서 이 팬덤이 아이브, 르세라핌 등으로 이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숏클립 시장의 성장은 좀 더 미시적인 영역에서 팬덤을 공고화하고, 일반인들에게 걸그룹을 대중화시키는데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문원 평론가가 지적한 걸그룹이 본격적인 성장을 이뤄낸 '코로나 19'의 발발 시점에 숏클립 시장이 극명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조금 더 걸그룹에게 유리한 판도로 미디어 업계가 개편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