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위협! 그렇게 느꼈다.
매일 이렇게 더울 수도 있다는 걸 실감한 올여름. 조금만 더 버티면 이 여름도 지나가리라며 토성에 올라간 날이었다.
몇 번의 계절을 함께 해서인지 내 발걸음 소리도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다. 삼색이 녀석이 덤불숲에서 부산스럽게 반긴다.
밥 주기가 부담된다며 먹이 주기를 꺼렸던 게 먼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자기 밥그릇 앞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삼색이를 띠라 가다 멈칫했다.
비교적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었던 밥그릇 두 개가 굵은 나무에 꿰어 큰 나무 가지 사이에 걸려 있었다.
섬뜩했다. 그 행위 속에 담긴 악의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그게 무슨 뜻인지 차라리 몰랐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으리라.
나도 안다. 세상 모든 사람들 성향이 다 각각이라는 걸. 나처럼 길냥이들을 보면 녀석들의 생존이 걱정되는 사람도 있지만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걸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유형의 위협까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다가 올 여름 중 가장 시원한 여름일 거라는 아찔한 예보를 접한 올여름.
나는 몸과 마음이 괴롭고 힘들었다. 암과 전쟁 중인 남편을 남겨 두고 나 혼자 팔랑거리며 피서랍시고 어디를 다닐 수도 없어 그냥 집에 있었다.
우리 집은 연립주택 4층이라 계단을 올라가면서부터 그냥 푹푹 찐다. 저녁 7시에도 실내 온도가 36도다.
고양이 밥을 주러 다닌 여름이 처음도 아닌데 올해는 정말 힘들었다. 땀이 순식간에 범벅이 되었다. '내가 원래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었나?' 이런 의문이 다 생겼다.
근무를 하시며 쉬는 시간마다 고양이들 밥을 주러 다니시던 은토끼님 건강에도 무리가 오셨다. 연차를 쓰실 때마다 며칠씩 더 빈자리를 채우다 보니 내 건강도 무리가 생기는 걸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공황장애를 겪은 원인은 두 가지였다. 숨 막히는 무더위와 좁은 공간에 갇힌다는 두려움.
그런데 이런 일까지 생긴 것이다.
남편은 지난해 발병한 암 때문에 신약을 먹었었다. 신약은 암 수치를 기적적으로 내리게 했지만 부작용 또한 장난 아니었다. 부종과 피부가 검게 변하는 등의 여러 증상으로 두 달 만에 중단. 다른 약을 먹어도 야금야금 올라가는 암수치 때문에 결국 전문 암센터로 넘어갔다. 거기서 각종 검사를 다시 받고 의료보험이 일부만 되는 약을 처방받았다.
노년에 연금으로 살아가는 우리 집 형편상 공원 냥이들의 캔과 파우치 비용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이다.
- 내가 앞으로 얼마나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그만둬야 하는데. 토성 고양이들은 지금이 정리할 때겠지?-
마음을 다져먹고 초화와 삼색이에게 이틀을 가지 않았다.
나는 ‘까맣게 기다린다.’는 의미를 안다. 국민학교 시절 부모님과 떨어져 조부모님에게 3년 동안 맡겨진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며 아들 둘을 키울 때 어린 시절의 이 분리불안은 나를 지나치게 무리하게 했다. 아들들이 느낄지도 모르는 엄마의 빈 자리를 줄이기 위해 그야말로 발버둥쳤다.
결국 이틀 뒤. 교회를 가며 초화와 삼색이 녀석이 나오는 곳을 가보았다.
앞으로 여기 못 오니 너도 나오지 말라고 분명 말했었다. 솔직히 무섭기도 하지만 너한테 매일 급식을 하기에는 나도 부담이 되니 나를 잊으라고 한 것이다.
삼색이 녀석은 보통 영리한 게 아니다. 어느 날인가 닭가슴살이 한 개 밖에 없어 그것만 주며 오늘은 캔이랑 이것만 먹으라고 한 적이 있었다. 평소처럼 닭가슴살을 덥석 물어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밥그릇과 나를 번갈아 보며 ‘ 오늘 급식이 왜 이 따위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못 믿겠지만.
이틀을 안 갔으니 과연 녀석이 없었을까?
있었다. 밥그릇 바로 앞 나무 둥치에서 잠이 든 채. 내 기척을 듣더니 바로 몸을 일으키는 녀석의 얼굴에는 기다린 티가 역력한 데다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무엇보다 녀석이 기대고 있던 나무 둥치가 얼마나 반질거리는지? 마음이 짠해졌다. 그놈의 밥이 무언지?
사람들도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을 쓴다. 녀석이라고 뭐가 다르랴? 그냥 하루 한 끼 밥을 주러 오는 사람을 무작정 기다리는 게 죄는 아닐 텐데.
나는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더 선량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보통의 평범한 성정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어쩌다 공원 고양이 아롱이를 만나면서 넉넉지도 않은 살림에도 이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월요일. 박물관 도서관 모두 휴무일이다. 박물관 뒤 계단에서 건사료와 물을 갈아주고 있는데 아롱이가 나왔다. 사랑이가 있는 박물관 위 소수레로 데리고 갔다. 아롱이는 강아지처럼 나를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멀리 남한산을 거쳐 온 바람이 제법 땀을 식힌다. 이미 미지근해진 음료수를 꺼내 마시며 모녀를 바라보는 내 음은 애잔하기만 하다.
이런저런 사유로 책도 읽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하며 코로나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몇 주간이 흘러갔다.
그 사이. 사람이 하는 일이라 실수도 있고 너그럽지 못하게 짜증을 낸 적 또한 많았다.
거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 모래알보다 작은 내 존재도 지금처럼 흘러갈 것이다.
작은 소망을 하나 말하면 적어도 내가 존재하는 시간 속에서 공원 고양이 밥을 주는 네 몸을 이렇게 꿰어버리겠다는 협박은 사절이다.
여전히 냄새를 맡지 못하면서도 '까미 정말 잘 데려왔다.'는 남편 같은 사람이 더 많아지기만을 그래도 욕심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