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다들 어려웠던 시절의 아픈 기억들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지만 유독 기억이 오래 남는 이유는 뭘까?
1970년대 언저리.
나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2학년인 남동생 그리고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막내까지. 우리는 화성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역 근처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거기서 제법 걸어야 제기동 가는 시내버스로 갈아탈 수 있었다. 고대 앞을 가는 시내버스까지는 잘 탔다. 문제는 내려야 할 고대 앞을 지나쳤다는 데서 생겼다. 당시 한 정거장은 제법 거리가 멀었다. 중간에 내려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잘못 내린 정류장이 미아리 근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으로는 예닐곱 정류장 정도는 너끈히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집에서 닭을 이십여 마리 기르셨다. 그렇게 기르신 닭이 낳은 달걀이 주말마다 서울로 가는 삼 남매의 차비였다. 그 달걀을 삼거리 가게에 팔아 버스 요금을 냈다. 그 돈은 딱 셋의 어린이용 버스 요금을 낼 정도였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시외버스를 탔는 데도 미아리에 내렸을 때는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우리 셋은 말없이 제기동 쪽을 향해 걸어야 했다. 버스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기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을 찾아갔다.
지금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당시 우리 삼 남매의 옷차림과 낡은 운동화다. 누가 봐도 시골에서 올라온 티가 나 남루하기 짝이 없었을.
왜 나는 그 기억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을까? 고향 화성 구포동 삼거리에서 고려대학교 캠퍼스 맞은편에 있는 제기시장까지 거의 3년 가까이 주말이면 수없이 오갔는데도 말이다. 겨우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오후가 되면 학교를 가기 위해 다시 되돌아가야 할 길을 우리 셋은 기를 쓰고 오갔다. 딱히 조부모님이 우리를 구박하시거나 불편하게 구신 기억이 없는데도.
그냥 잠시라도 부모님 곁에 있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채근을 견디지 못하신 엄마는 시장 주변에 방을 하나 구해 우리 셋을 데려오셨다. 그게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바라고 바라던 대로 서울로 전학 온 나는 행복했을까?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3년간 부모의 손길이 부족했던 여파는 전학 오자 금방 드러났다. 특히 산수는 거의 지진아 수준이었다. 국민학생도 월말고사를 보던 시절이었으니 학습력은 감추려야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시골뜨기 전학생을 대하던 같은 반 아이들의 은근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기억한다.
그 일의 정점은 5학년 말 어느 날 일어났다.
낡고 빨아 신지 않아 지저분한 내 운동화가 화근이었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왜 주번을 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 우리 담임 선생님은 교실 청소 관리를 하지 않았다. 당연히 청소 당번들이 대부분 도망가 버렸고 그 뒷정리를 혼자 해야 했다. 주번을 같이 하는 아이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당시 학급 인원은 70명이 넘었다. 넓은 교실과 복도 청소를 마치고 문단속까지 하고 나니 날이 어둑해졌다. 텅 빈 교실과 복도의 느낌이 너무 썰렁해 살짝 겁이 났던 기억이 난다. 서둘러 복도에 있던 신발장으로 간 나는 아연해졌다. 내 운동화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비웃듯이 나를 아래위로 깔아보며 지껄이던 도망간 당번과 그 친구들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더러운 신발을 신발장에 함께 둘 수 없다.'던 말도.
지금은 그 아이들의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경멸 어린 표정과 빈정대던 말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확연히 기억한다.
시골에서 전학 와 심하게 위축되었던 나는 그 아이들에게 원망의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물론 담임에게 이르거나 그 아이들의 악행을 소문내지도 않았다.
내 낡고 헌 운동화는 쓰레기장을 뒤져서야 찾을 수 있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낡은 운동화를 손에 들고 맨발로 돌아온 나를 보고 엄마는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사실 나는 그때의 일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중학교 교사로 임용된 두 번째 해가 되기까지는.
나는 그 해 중학교 2학년 여학생반 70명 담임을 맡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여학생이 전학을 왔다.
나를 따라 교실로 가는 동안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지는 걸 보고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쓰였다. 교탁 바로 앞에 자리를 정해 앉히고 조회 후 바로 수업을 하던 나는 놀랐지만 표정을 바꾸지 않아야 했다. 분명 물이 아닌 소변이 교탁까지 흘러와서였다.
창백해지다 못해 눈물이 그렁해지는 그 여학생을 본 나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짝에게 양호실로 데려가 체육복으로 갈아입히고 조금 진정될 때까지 있다 오라고 둘을 내보낸 뒤. 대걸레를 가져다 흔적을 닦는 나를 여학생들이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 까만 눈망울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던 그 순간. 십몇 년 전 내가 겪은 그 운동화 사건이 떠올랐다. 진심의 힘을 믿어야 했다. 나는 천천히 그 이야기를 마치고 여학생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 '아직 어릴 때는 그 사람이 자라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잘 모른다. 나는 그런 일을 겪었지만 지금은 너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때 가난하고 어리숙한 전학생을 조롱하고 비웃던 아이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분명한 건 내가 그런 일을 겪었어도 지금은 선생님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전학 온 그 여학생이 자라서 너희들을 어떻게 기억할지 그건 너희들이 하는 행동과 말에 달려 있다. 그 친구는 너무 긴장해서 자기도 모르게 소변을 볼 정도로 힘들고 괴로웠을 게 분명하다. 그런 친구 이야기를 단지 재미로 험담하고 나쁜 소문을 낸다면 어떨까? 그 친구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나쁜 친구들로 너희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너희가 그런 친구로 남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 실수를 감싸고 보듬어 주고 따뜻하게 대해 줬으면 하는 게 선생님의 바람이다. 나처럼 나쁜 기억으로 남을 일이 없도록. 나는 너희들이 오늘 전학 온 친구의 실수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고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그걸 해 줄 수 있겠니?-
교실 분위기가 얼마나 가라앉았었는지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우리 반 착한 여학생들은 전학 온 친구를 진심으로 대해준 모양이었다. 평생 그 여학생을 괴롭혔을지도 모르는 실수에 대해서도 소문이 돌지 않았다.
다음 해. 중 3 교실 복도에서 여러 친구들에 둘러싸여 웃고 떠들다 나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 여학생을 보며 우리 반 착한 제자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 일로 과거 내 상처도 어느 정도 치유받았던 것처럼 느꼈다면 과장일까?
남편이 다음 주 일하러 가는 현장이 미아리라며 막내 외삼촌 이야기를 꺼냈다. 막내 외삼촌은 미아리에 사셨다. 제기동에서 멀지 않아서 나도 제법 미아리 외삼촌댁을 드나들었다. 무엇보다 막내 외삼촌은 우리 결혼의 다리를 놓아주신 분이다. 외삼촌이 타계하신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남편은 미아리 하면 저절로 외삼촌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올해는 10월에도 비가 자주 내린다. 지난여름의 길었던 폭염처럼 겨울 한파도 만만치 않으면 어쩌지 싶어 겁이 나서 일까? 미아리라는 단어 하나에도 상념처럼 어려웠던 시절이 줄줄이 소환되어 떠오르는 걸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