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수 것인가, 뱉을 것인가.
나는 올해로 결혼한 지 11년 차 효부 코스프레 중인 며느리다. 효부 코스프레를 위한 나의 행동은 이렇다. 어머니의 생신이면 꼭 어딘가 여행을 간다. 여름휴가도 꼭 우리의 휴가 날짜가 아니더라도 주말에라도 시간 내서 어머니를 모시고 바다든 계곡이든 다녀온다. 한 달에 한 번은 우리 집으로 오시라고 해서 1박을 하고 가시게 하거나, 우리가 일부러 어머니댁을 방문해서 1박 이상을 하고 온다. 사실 며느리라면 거의 하고 있는 일이다.
근데 이것이 효부 코스프레가 되는 이유는 어머니의 특별한 자랑 능력 덕분이다. 내가 하는 이런 일들이 보통 100의 일이라면, 어머니를 통해 이것이 200이 되어있다. 시댁 어른들은 그래서 입을 모아 나 같은 효부가 없다고 늘 말씀하신다. 어머니의 이 같은 능력은 참 마법 같으면서도 신기하다. 시댁 어른들이 효부라고 말씀하시면 좋은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이 부담스럽다.
얼마 전 어머니와 이모님을 모시고 어버이날 기념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태 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온 지금까지의 여행과 다르게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어머니께서 요구하는 게 많았다. 내가 사는 곳에서 서해는 많이 멀다. 그래서 4시간에서 5시간 이상은 가야 한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맨날 가는 동해말고 서해에 가자고 하셨다. 늘 우리가 여행을 계획하면 하자는 대로 하셨었는데, 이번 여행은 어쩌면 시작부터 독사과가 예고되어있었던 같다.
어머니도 차를 오래 타면 멀미를 하시면서, 차 타는 거 싫어하는 아이가 있는걸 뻔히 아시면서도 서해를 가자고 하시는 말씀이 기가 막혔다. 어머니께서는 서울에 계시니 어디든 기차 타고 가면 되는 것이지만, 우린 모시고 다니려면 어쨌든 차를 타야 했다. 나는 아이를 생각해 절대 안 된다며 신랑을 뜯어말렸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신랑은 내가 말리면 듣는다. 그래서 여행의 목적지는 결국 동해로 할 수 있었다.
기차역에 내려서 어머니는 묵호항에서 난데없이 주문진 시장을 찾으셨다. 내린 곳 자체가 다른데, 동해와 강릉은 천지차이인데, 묵호항을 구경할 생각으로 묵호역에서 내리시라 분명 말씀드렸는데, 묵호항에서 주문진을 찾으셨다. 거리가 멀다고 말씀드렸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으면 한다고 하였더니 "니들 좋은 거 먹어라"라며 첫 번째 독사과를 던지셨다. 정말 우리가 좋은걸 먹으려면 그곳에서 알탕 맛집으로 유명한 곳에 가야 하는데, 물에 빠진 물고기는 안 좋아하신다, 명태탕 알탕 종류는 안 드신다 말씀하신 후에 그렇게 말씀하시니, 빛 좋은 독사과라도 덥석 받아먹을 수 없었다. 저 사과를 먹는 순간 탈이 날 거라는 걸 알았다.
점심을 먹은 후 주변을 관광하다, 오션뷰가 좋은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 앉아서 메뉴를 정하는데 어머니께서 카드를 주시면서 이걸로 사라고 하셨다. 두 번째 독사과다. 옆에 계신 이모님께서는 어차피 너네는 아들이 하나라 네 돈이 엄마 돈 엄마 돈이 니돈이다 가서 그걸로 사라고 거드셨다. 아니다. 분명히 하는 말이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굉장히 위험하다. 부모 자식 간에도 니돈은 니돈 내 돈은 내 돈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너는 너 나는 나여야 한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너와 나를 동일시하셨다. 계산이라는 독사과 앞에서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사이 신랑은 화장실에 가버렸다. 꼭 이렇게 중요한 타이밍에 신랑은 없다. 신랑이라도 있으면, 이 독사과에 대한 결론이 쉬울 텐데, 결국 망설이다 독사과를 받았다. 하지만 곧 탈이 났다. 주문한 음료와 빵이 나오니, 이건 얼마니 저것은 얼마니, 커피값이 제일 비싸다며 타박이 시작되었다. 이럴 거였으면 그냥 내 돈으로 사는 거였는데, 꼭 이렇게 비싼걸 왜 사 먹냐고 타박하시는 것 같아 카페에 앉아있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두 번째 독사과를 먹고 나니, 세 번째부터는 오기가 생겼다. 자꾸 던지는 독사과에 나도 한번 반격을 해보리라 이상하게 꼬인 마음이 들었다. 저녁을 먹으러 가서, 안내받은 자리에 창문이 열려있는 걸 보고 어머니께서 손녀딸 있는 쪽으로는 추우니까 문을 닫고 내가 앉은자리 쪽으로 창문을 열라고 하셨다. 서러웠다. 평소 우리 공주 우리 공주 하시더니, 이럴 땐 아들과 손녀딸이 우선이고 나는 추워도 된다는것이가 왜 내쪽의 창문을 굳이 고집하시는 건가 하는 생각에 순간 울컥해서 "시댁에서 하는 말은 방부제가 들어있어서, 한번 뱉은 말은 잊어버리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저도 추워요 어머니!"하고 웃으며 반격을 하였다. 10년 차가 되니, 이 정도의 반격을 웃으면서 할 수 있는 능글맞음이 생겼다. 결혼 초의 나 같았다면 속으로 삭히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신랑을 붙잡고 펑펑 울었을 일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께서도 민망하셨는지, 잠깐 웃으셨다. 하지만 잠시 후 내 생일이라고 생일상 차려주는 사람은 며느리뿐인데, 나는 우리 공주밖에 없다는 말씀을 이어서 하셨다. 이것은 마치 내가 결혼하자마자 어머니께서 나는 연금 안 들고 며느리 보험 들었다 하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뉘앙스의 독사과를 또 던지셨다. 여기서 기가 막힌 건 곧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나의 대답 여하에 따라 어머니 생신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아직 아무 계획도 하지 않았는데, 음력이라 어머니 생신은 늘 공휴일 아니면 주말이라 이번에도 선거일이 딱 걸려 있는 그날 하루의 휴일이 얄미울 수밖에 없는 독사과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는 사이 정말 고맙게도 음식이 나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포기를 모르는 분이셨다. 나에게 또 한 번 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난감하고 당황스러울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다. 그래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나는 딴짓을 하다 주문을 핑계로 자리를 비워버렸다.
이후에도 여러 번 독사과를 계속해서 던지셨다.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까지도 어머니께서는 나를 괴롭히셨고, 그날은 여태 어머니와 여행을 다녔던 날 중 가장 피곤한 날로 기억될 만큼 정말 힘들었던 날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진짜는 다음날 아침부터였다.
일찍 기상하신 어머니와 이모님께서 계속해서 조개탕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 아침에 조개탕을 어디서 구해오라는 것인지, 못들 은척 하고 내가 준비해 온 것들로 아침을 차렸다. 이모님은 대놓고 라면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라면 안 드시는 줄 알고 안 갖고 왔는데, 다음부터는 라면으로 준비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침을 드시고 티비를 틀어놓으셨는데, 하필 틀어놓은 프로그램에 나온 할머니 한분이 말씀하시길 "시어머니 좋아하는 며느리 있으면 데려와보라 그래요! 아무도 없어요!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걸 본 어머니께서 "공주야! 시어머니 좋아하는 며느리 있으면 데려와보란다!" 하는 앵무새 같은 말씀을 하셨다. 독사과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결혼 11년 차가 되었지만, 아직도 모르겠는, 독사과였다. 내가 독사과를 어쩌지 못해 진땀을 흘리고 있는 이 상황에 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고 있는 신랑이 얄미워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숙소 체크아웃 시간에 맞추려면 바쁘다는 듯 짐을 싸는 모습으로 못 들은 척 내 할 일을 하는 모습으로 대답을 대신하였지만, 나의 속에서는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화가 한순간에 터졌다. 점심 메뉴를 결정하는데,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말씀드리는 메뉴마다 싫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이고~ 정말 못 모시고 다니겠네요" 라며 어제부터 참고 있었던 나의 본심이 나도 모르게 툭 새어 나왔다. 잠깐의 정적 이후 어머니께서는 아무것이고 좋으니 너 먹고 싶은 거 먹으라는 독사과를 또 던지셨다. 내가 지금 먹고 싶은 건 내 속을 시원하게 뚫어줄 맥주였다. 음식이 아니었다. 애꿎은 짜증은 신랑에게 돌아갔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그냥 어머니 가자고 하는 대로 가자며, 난 이제 몰라하는 말을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검색을 끝까지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한숨만 터져 나왔다. 오전 내내 메뉴를 고민하다 우연히 얻어걸린 낙지볶음이 아주 매콤했다. 매콤한 음식 덕분에 나의 스트레스는 진정된 듯하였지만, 사실 어머니가 탑승하신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내 속은 진정되지 않았다. 다행인 건 신랑이 나의 노고를 알아준다는 점이었지만, 이후에 또 불행인 건 어머니께서 시댁 어른들과 신랑의 친척들이 다 모여있는 단톡방에 내가 어머니께 전달한 사진을 올리며 자랑을 하셨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또 한 번 효부 코스프레를 해야 했다.
마음속에서는 천불이 끓고 있는데, 어머니와 거리두기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어머니께 사진을 전달하며 어머니 즐거웠습니다. 다음번에 또 같이 가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나의 며느리적 위치가 서글펐던, 독사과를 잔뜩 앞에 두고 먹을 거야 뱉을 거야를 끝없이 시험당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