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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쌤 Dec 21. 2021

아이에게 필요한건 시간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우리의 성장과 행복은 그 반응에 달려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저서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 박사의 말이다. 

누구나 자극을 받지만 다른 반응을 보인다. 같은 자극에도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그 원인은 자극과 반응 사이의 빈 공간에 있다. 그것은 물리적 공간일수도, 시간적 공간일 수도 있으며 나에게 들어온 반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이 빈공간에 달려있다. 


특히 아이에게 이 공간은 더욱 중요지만 아이에게 공간이 주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어른의 시간과 아이들의 시간은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른의 시간은 초단위로 빨리가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아이들 저마다 다른 속도를 지닌다. 아이들의 시간이 비교적 빨라 어른과 비슷하다면 다행이지만 상대적으로 느리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어른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게 된다. 어린 아이가 신발을 신는 것, 혼자 밥먹는 것부터 시작해 학령기가 되어 학업에 신경쓸 나이가 되면 더욱 그렇다. 대부분 학령기 아이들은 부모의 속도에 맞추어 움직인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를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옆집 아이를 보면, TV 속 영민한 아이를 보면 조금쯤 내 속도에 맞추어 끌고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인다. 이렇게 첫 단추를 수동적으로 시작한 아이는 능동적으로 바뀌기가 쉽지 않다.


 지오는 4학년이다. 지오가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영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중요과목이면서 외국어인 영어를 시작하는 시기를 놓고 보통 영어유치원에서부터 시작을 한다고 주변 엄마들이 많이들 이야기 했다. 시작을 어떻게 해야할지 갈팡질팡하다가 복직할 시기가 눈앞에 다가왔고 일단 영어는 미루어두고 엄마의 퇴근시간은 맞추어야하니 6살부터 다니던 바둑학원에 그대로 보내기로 했다. 고비도 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나는 지오를 어르고 달래 달래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바둑에 할애했다. 지오가 1학년이 되던 어느 날, 정말 바둑에 흥미가 떨어졌다고 했다. 학원에서 대국을 하는데 들어온지 한 달 정도 된 3학년 언니와 대결해서 졌다고 한다. 승부욕이 남다른 아이인데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3년의 시간을 한 달 만에 따라잡히다니...엄마인 나도 허무함이 밀려왔다. 


  문득 대학생 시절, 교직수업시간 아이가 외국어를 습득하기에 적절한 시기는 초등 3~4학년이라고 배웠던 기억의 조각이 떠올랐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기지만 그때도 영어유치원 등 이른 영어교육이 성행하던 시기라 ’생각보다 늦네?‘하고 고개를 갸웃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저 이론일 뿐인 그 말이 지오의 3학년 언니와의 바둑대국을 통해 ’정말 그렇구나‘하고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바둑학원에서는 3년간 짧은 주의집중력을 지닌 아이에게 단순하고 꾸준하게 바둑을 가르쳤을테지만 배울 준비가 갖추어진 3학년 언니의 한달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이후 지오는 바둑을 그만두고 미술, 피아노학원을 전전하다가 어느 날은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다며 학원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엄마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야해서 매우 지쳤다며 쉬고싶다고 했다. 그렇게 지오는 옆집 아이가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는 시기에 학원을 끊고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역시 영어였다. 3학년이 되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미 영어를 공부해온 아이들과 너무 많은 격차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나중에 영어학원에 보내려해도 기본실력조차 갖추지 않으면 받아주는 영어학원이 없을것이라는 친구의 말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엄마표 영어도 해보고 아빠에게 의뢰해 아빠표 영어도 해봤지만 ’내 아이는 가르치는 게 아니다.‘라는 교훈만 얻고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엄마로서 더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지오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극을 받지 못한 것이다. 자극이 있어야 반응을 할텐데....내가 주는 자극은 잔소리일 뿐 지오를 움직이는 자극이 되지 못했다. 지오가 4학년이 된 어느 날, 숙제를 도와달라고 했다. 영어 숨은그림찾기였다. 그림 속 숨은그림을 찾아야하는데 숨은그림이 영어로 제시되어있어 영어에 유창하지 못했던 지오는 숨은 그림을 찾을 수 없었다. 단순하고 기본적인 단어도 모르고 도움을 요청하는 지오를 보자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넌지시 학원을 권유했더니 못이긴척 그러겠다고 한다. 영어를 배울만한 자극이 생긴 것이다. 집 앞 학원에 등록하고 지오는 영어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제법 어려운 문법들도 고심해서 과제를 해내고 매일 치루는 단어시험도 잘 준비하는 눈치다. 얼마전에는 보충학습이 필요하다며 인터넷서점에서 교재를 검색해 사달라고 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루 한 장씩 꾸준히 풀어나가고 있다. 퇴근 후 집에 가면 채점해달라고 시도때도 없이 눈앞에 문제집을 들이민다. 지오가 비로소 영어공부를 할 준비가 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불안감을 이기며 기다리길 잘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4학년 지오는 학원에서 1학년생과 함께 공부한다. 이미 학원을 다니던 아이와 비교하면 실력이 형편없다. 하지만 삶은 길다. 혹시나 지오가 영어를 포기하더라도 주어진 자극을 반응으로 이끌어내는 공간을 활용하는 값진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 경험이 지오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자극에 건강하게 반응하게 할 마중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영어 좀 못하면 어떤가? 정작 영어를 강조하는 엄마도 영어에는 자신이 없는걸,,,,그래도 행복한데는, 성장하는데는, 살아가는데는 문제가 없는걸...필요하면 영어에 많은 시간을 들이면 되는 것이다. 엄마가 그렇듯 지오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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