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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솔 Jan 14. 2024

우리가 걷고 난 자리에는

피스어스x유진솔 이야기


모농숲 달팽이텃밭


 겨우내 얼었던 땅에 고랑을 만들어 감자를 심었다. 이것이 3년째 봄을 맞이하는 방식이다. 경운기로 간편하게 하면 될 것을 쟁기로 느릿느릿, 직선으로 고랑을 만들면 될 것을 곡선도 만들고 달팽이모양으로도 텃밭 모양을 디자인해가면서. 사부작사부작 몸을 움직여 가면서 봄을 맞는다. 


 이것이 봄을 맞이하는 방식이 된 것은 모농숲과 피스어스 덕분이다. 피스어스는 여성, 생태, 예술이라는 가치를 유보하지 않는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 2021년 유성구 제로웨이스트샵 은영상점의 사적모임으로 시작했던 피스어스는 2022년 비영리임의단체로 설립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에코페미니즘 커뮤니티’라는 정체성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서로를 돌보면서, ‘생존(살아남음)’ 너머 ‘생활(삶을 꾸림)’이라는 감각을 깨우길 바라면서 유성구 대정동을 기반으로 공유텃밭 공동체 [모농숲]을 꾸리는 활동을 열고 있다. 

 [모농숲]은 ‘모여봐요 농사의 숲’의 줄임말으로, 땅에 해롭지 않은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때때로 채식요리를 해먹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또한 [뜨거운 뜨개방]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몸을 긍정하고자 뜨개질로 브라렛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여성의 몸은 물론 지구를 해치지 않는 면 생리대를 바느질로 직접 만드는 활동도 종종 연다.)


 쑥국쑥국 

 지난해 봄에는 피스어스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쑥 캐서 쑥버무리 해먹자’며 [쑥떡쑥떡] 프로그램을 열었다. 올해 봄에는 피스어스 친구들과 올 한 해 무얼 하고 싶은지 나누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쑥국과 함께 유진솔 공연을 열고 싶다고 말이다. 나는 유진솔이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짓고 부른다. 누군가 공연에 불러주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하고 싶은 공연을 직접 만들겠다는 마음이 싹텄다. 그 마음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는 뚜렷하지 않으나, 이날 친구들에게 말을 뱉은 것이 ‘약속’처럼 여겨지면서 곧바로 포스터를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모인 피스어스 친구들과 뜯은 쑥을 손에 쥐고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배경으로 [쑥국쑥국] 포스터를 만들었다.


 쑥국, 쑥전 그리고 쑥차와 함께한 [쑥국쑥국]을 무사히 열고 4월의 모농숲에 쑥갓, 대파, 방울토마토, 당귀, 부추, 메리골드 등을 심었다. 지난해 나눔 받은 씨앗들도 군데군데 심었다.



 달팽이계절

'달팽이계절' 전시 속 달팽이만다라


 지난해 겨울에는 [달팽이계절]이라는 이름으로 피스어스 활동 기록전시를 열었다. 마당극패 우금치의 ‘2023 오색찬란 별별축제’의 연계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던 [달팽이계절]에 모농숲 주민들의 일기, 사진, 직접 일군 농산물, 뜨거운 뜨개방 작품들, 면 생리대, 텃밭 근처에서 주운 자연물로 만든 만다라 등을 전시했다.


 그때 여성인권티움 그냥공방(위기청소녀 자립지원) 사람들이 방문했는데 그렇게 연이 시작되어 올해 상반기에 텃밭을 함께 돌보았다. 똑같은 장화, 몸빼 바지, 밀짚모자를 맞춰 입고 쭈뼛대며 땅의 고랑을 만들고, 힘이 든다며 노동요를 틀어달라고 말하고, 냉이를 보면서 쑥이라 말하던 모습에 금방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갈수록 더워지는 여름에는 함께 심은 감자 옆에 이름 모를 풀들이 마구 자라났기에, 열심히 풀을 맸다. 뜨거운 햇볕을 아스팔트 길 위에서 날 때면 무력감이 치밀었지만, 흙을 만지고 풀을 뽑은 날이면 작은 뿌듯함이 일었다. 장마가 오기 전, 감자를 모두 캤다. 비가 오던 날에는 감자를 부쳐 먹고 제철야채인 오이와 토마토로 샐러드를 해먹었다. 처음 요리해보는 이가 있어, 요리하는 기억이 즐거움으로 자리 잡길 바랐다.


 요리를 함께 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은 내게 꽤 소중하고 특별하다. 그래서 모농숲 친구들과 채식요리를 해먹을 때면 늘 [Food Blessing]을 했다. 이는 음식이 오기까지 과정-정성껏 요리한 이들의 손길, 농사 지은 이들의 노고, 함께 농사를 도와준 바람, 비, 햇빛, 땅-에게 고마움을 곱씹는 시간이다. 



 춤추는 토마토 

 음식이 오기까지의 과정을 헤아리다 보면, 육식을 하는 게 어려워졌다. 비인간 동물이 착취당하는 현실이 떠올라서였다. 자연스럽게 채식 생활을 한 지 5년차가 되어간다. 채식을 하면서 다양한 요리를 창조하게 된다. 그러다 채식 생활을 하는 유튜버 [초식마녀]에게도 스며들었는데, 그가 토마토비빔밥을 해먹는 영상을 보았다. 제철 채소이면서 불을 쓰지 않아 여름에 요리하기 제격이었다. 


 쑥국쑥국에 이어 비건 다이닝 공연 여름편의 메뉴는 토마토비빔밥으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하우스신시어와 함께 공연을 준비했다. 하우스신시어는 대전 맞배집에서 새롭게 출범한 공연기획사 겸 에이전시다. 유진솔로 협력 아티스트 계약을 맺었다. 하우스신시어 친구들과 여러 회의를 거치고, 토마토비빔밥을 해먹는 영상을 공개하고, 테미오래 옛 도지사공관 야외정원에서 라이브 영상을 찍는 등 준비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공연일인 8월 10일. 절기상으로는 말복인 이날 현실에서는 열대성 태풍 ‘카누’가 전례 없이 한반도를 수직한다는 뉴스가 휘몰아쳤다. 그날 공연이 있던 나/우리는 불안에 떨었다. 공연을 보러 오기로 했던 관객/친구들 또한 그러했다. 


 사실 8월 10일이 오기 전 다른 걱정이 있었다. 제철야채 토마토로 비건 보양식을 먹고 음악을 즐기는 말복을 보내자는 이 기획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토마토 농사를 지으며 수해 입은 이들에게 이 공연이 어쩌면 불편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8월 10일이 되니 태풍은 나에게 직격타로 다가온 그 무엇이 되어 있었다. ‘타인’에게 다가온 문제가 아닌 ‘나’에게 다가온 무엇. 


 우리는 당일 티켓 환불이 가능하도록 다시 안내했고 몇몇 이들은 발걸음을 포기했다. 공연이 다다를 무렵 다행히 태풍은 지나가고 공연은 ‘무사히’ 한여름 밤의 꿈처럼 소중한 기억이 될 수 있었다. 



 “저기 가는 여름아 먼 길 잘 가렴아/비록 덥긴 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오/그대 더운 열기로곡식들은 자라고/열매들도 익어서 추운 겨울 잊게 해/그대 환한 빛으로 우리는 꿈꾸네 / 긴긴 어둠 맞이할 마음의 빛을 / 잘 가라 여름아 너도 수고 많았어 /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안녕 안녕” - 잘 가라 여름아 (김희동 작사작곡 청요) 노랫말 중 


 너무 덥고 너무 많은 비가 내리던 여름은 잔혹한 한편 고마움을 주었다. 직접 뜨개질한 비키니를 입고 가까운 강변에서 친구들과 헤엄치던 기억, 우쿨렐레 함께 치며 두 계절을 연습하고 사람들에게 선보였던 기억, 커다란 흰색 천에 주황색 빨강색 연두색 토마토를 함께 그려 넣던 기억 등. 인간 때문에 지구가 이 지경이 되었다지만, 인간으로 살면서 만난 사람들의 온기에 기대어서 여전히 살아간다. 


 9월 23일에는 많은 이들이 으능정이 거리에 모여서 “기후재난으로 죽지 않고,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라”는 목소리를 외쳤다. 나도/피스어스도/친구들도/가족도 함께. 감을 따는 장대와 입지 않는 옷으로 만든 깃발을 높이 세우고 거리를 걸었다. 우리가 걷고 난 자리에는 ‘차별 없는 세상’ ‘사랑’과 같은 글자가 새겨졌다. 그게 꼭 함께 늙어가자는 약속처럼 느껴졌다. 


사진/ sunny




(*본 원고는 대전세종연구원 대전여성가족정책센터 [여행대전]에 실린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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