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 목요일 나는 하노이에 있었다. 월요일 나는 파리에서 눈을 떴다. 모든 사람이 잠들어 있는 새벽 1시 나는 점심을 먹었다. 뉴욕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날도 늦게 눈을 떴다. 반쯤 감긴 시린 눈으로 연희동 집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스르륵 주저앉았다. 이내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어제 일이 힘들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난밤 찐 고구마 한 개와 우유를 마시고 허기만 채운 채 잠이 들었었다. 때로 발바닥이 따끔따끔해서 걷기가 힘들다거나 반지가 빠지지 않아 한참을 손가락을 잡고 있다거나 하는 등의 일은 가끔 있는 일이었다. 어떤 날은 밥을 먹고 나면 무척 졸리는 날도 있었다. 시차 때문인가 생각했다. 입안이 까슬까슬할 때도 있고 소화가 잘 안 될 때도 있었다. 병원을 가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불편했다. 산책을 다녀오면 좀 괜찮아졌다. 이렇게 컨디션이 난조일 때마다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내 귀에 못이 박히게 한 유일한 잔소리는 "건강하게 먹어라"였다. 제철에 생산된 국내산 농산물인 신선한 재료를 이용해 간단하게라도 직접 해 먹으려 노력하라는 바람이셨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틈틈이 요리도 배우러 다녔고 서점 갈 일이 있으면 요리책도 펼쳐보았고 음식 관련 다큐멘터리도 찾아보았다. 아버지 잔소리 덕분이었을까 건강한 먹거리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해외 어디를 가더라도 제철 싱싱한 산물이 있는 그 지역의 전통 재래시장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20대 중반, 나의 첫 시장은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었다, 1907년에 8명의 상인들이 문을 열었고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이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생선 가게가 가장 유명하다. 성인의 필뚝만 한 생선을 던지고 주고받는 상인들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도 인상적이다. 이 생선을 던져 주고받는 플라이 피시는 생선 판매하는 상인이 손님에게 생선을 보여주기 위해 하는 행위인데 손님들의 시선을 끌어모아 생선 판매에 도움은 물론 사진 촬영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리고 1971년 당시 만들었던 로고와 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스타벅스 1호점과 해산물 레스토랑 'Crap pot'도 있다. 이 레스토랑의 'seafeast' 메뉴는 단연 최고다. 랍스터, 대게, 새우, 조개 등 각종 해산물과 옥수수, 감자 등을 함께 찐 비스킷을 들고 와 테이블 위에 한데 쏟아 놓고 망치로 부수어 먹어야 하는데 맛도 맛이지만 식사 시간이 즐거워지는 것은 덤이다. 자연 그대로 바다의 맛을 느낄 수 있고 버터오일 소스도 풍미를 돋운다.
-출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공식 홈페이지
두 번 째는 세인트 로렌스 마켓, 2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토론토 최초의 시장으로 꼽힌다. '토론토의 부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는 마켓은 신선한 식자재를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는 곳이다. 마켓 내 음식점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한 끼 식사도 할 수 있다. 시장 주변 일대가 번화가여서 토론토에 오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찾게 되는 명소이다. 시장을 이루는 두 개의 건물은 과거 시청사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매주 토요일은 캐나다 최대 규모의 장터로 꼽히는 파머스 마켓도 오픈한다.
내가 영국에 있던 1996년 처음 가본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마켓이자 가장 유명한 버로우 마켓은 현지인뿐만 아니라 여행자들도 많다. 2014년에는 시장 개장 1000주년을 맞았다. 영국 잉글랜드 센트럴런던의 템즈강 남쪽에 위치한 버로우 마켓은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음식을 판매하고 식재료의 종류가 다양해서 구경거리가 넘쳐난다. 주말에만 장이 서는 다른 마켓과 달리 버로우 마켓은 평일에도 문을 연다. 그리고 버로우 마켓에 갈 기회가 있다면 빠에야와 버섯 리소토 그리고 오이스터는 꼭 먹고 오길 추천한다.
미국 뉴욕의 첼시 마켓과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현대식 재래시장인 마르크탈 시장도 잊을 수 없는 시장 중 하나다.
연희동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인왕시장에 자주 간다. 그러다 최근에 영천 시장에 가게 되었는데 전통 재래시장인 영천 시장은 1960년대 서대문형무소 부근에서 떡과 이불을 팔던 가게가 시작이었다고 들었다. 주변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정말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곳이다.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도착한 시장에서 맑은 순두부찌개를 맛있게 먹고 시장을 한 바퀴 돌아 오이 한 무더기를 자전거 바구니 가득 담아 집에 오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을 만큼 부자가 된 것 같다. 오이는 4~7월까지가 제철이다. 제철이라 가격도 저렴한 데다 제철에 나오는 것은 못난 이어도 맛은 훌륭하다. 게다가 수분이 많은 오이는 염분 배출에 도움을 주니 다이어트에도 제격이다.
각 계절의 기운을 품고 자란 특정 시기나 계절에만 얻을 수 있는 해산물, 과일, 채소 등을 이용하여 만든 음식을 제철음식이라 한다. 제철음식을 먹으면 우리의 몸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게 되고 가장 좋은 영양상태의 음식을 맛보게 된다. 제철 식물은 야채와 과일이 재배되는 시기, 생선이 산란하는 시기 등에 의해 결정되는데 과일의 경우 수확하는 시기가 되면 당도가 높고 향이 강하며, 산란기의 생선은 지방질이 풍부해지고 살이 단단해져 맛이 좋아진다. 제철 음식은 다른 계절에 나오는 것보다 영양적으로 제일 좋다. 가격도 저렴하고 질도 좋다. 우리 몸이 자연과 잘 조화되려면 계절에 따라 제철에 생산되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만큼 수확하는 계절이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몸의 시스템이 오랫동안 계절 변화에 맞게 조절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도 날씨의 변화에 적응하고 절기에 따라먹는 음식이 다른 이유는 몸이 그 시기에 잘 먹어야 잘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음식에는 얼리어답터, 즉 빨리 먹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제 때 먹는 것이 건강한 것이다. 옛 조상들이 절기에 따라 농사를 짓는 것은 우리 삶에 누적된 통계에 의한 것이다.
나는 나의 생활리듬을 바꿀 수는 없으니 먹는 것을 바꿔보기로 했다. 그러나 매번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 또한 내 일상의 한계이다. 관리하기 힘든 조건의 직업을 가졌기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남이 해주는 음식이 맛있고 편하다고 해도 직접 요리를 해서 먹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손, 발이 붓기 시작하고 피곤함도 오래갔다. 건강검진종합소견 ‘정상 B’ 판정을 받았다. 자기 관리 및 예방 조치가 필요한 단계였다. 공복혈당장애의심, 고혈압전단계였다. 건강신호등에서 '주의'에 해당하는 요인에 대해서 적극적인 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소견도 함께였다. 정상에서 멀어져 경계수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행 근무가 원인이라기보다는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면서 입맛도 변하고 순환능력도 떨어지는 것 같았다. 때때로 기압차이 때문인지, 식사 후 바로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근무환경 때문인지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속이 불편한 적도 가끔 있었다.
서울 살이를 하면서 계수 씨가 2주에 한 번씩 반찬과 함께 곰국, 소고기 뭇국 등을 꽝꽝 얼려 보내주셨다. 아버지도 청도 한재 미나리 같은 제철 지역 특산품을 가끔씩 보내주셨다. 그래서 계수 씨 반찬 2~3가지에 계란 프라이를 해서 서울 밥상을 차려먹기 시작했다. 부모님 덕분에 5대 영양소 균형 잡힌 식사가 되었다. 계수 씨가 올려주신 것이 떨어지면 부족하지만 나도 나물반찬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정 어려우면 반찬가게에서 사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요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밥상은 점점 풍성하고 다양해졌다. 멸치 볶음을 하더라도 견과류를 첨가한다거나 아니면 꽈리고추를 더하는 등 색다른 멸치 볶음을 만들어 먹었고 생선구이도 생선 조림도 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계수 씨의 도움을 받았지만 요리를 배우면서 차근차근 나의 서울 밥상을 만들어 갔다.
그렇게 균형 잡힌 식사에 관심이 높아져 가던 중 우연히 음식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네플릭스 “세프의 테이블” 정관스님 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찰 음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 먹던 탕국국물을 양념 삼아 각종 나물을 비벼먹던 비빔밥, 사월 초파일에 먹던 절밥, 그즈음 내 머릿속은 종일 음식, 음식, 건강한 음식 생각이었다. 채식주의자도, 절제된 식습관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나는 막연히 사찰음식에 내가 좋아하는 식재료를 더 첨가해서 먹으면 건강한 음식으로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재료가 만들어지는 땅에서부터 채취해서 식탁에 오를 때까지 모두 수행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슬로우 중에 슬로우 그것이 사찰 음식이었다. 내려놓는 음식,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내는 음식, 오신채(마늘, 파, 부추, 달래, 아위)를 쓰지 않는 음식이다. 내가 평소에 즐겨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음식 욕심을 덜어내고 재료를 덜 쓰고 그렇지만 사용할 재료는 뿌리부터 잎까지 버리는 것 없이 완벽하게 다 쓰는 원재료의 맛과 향이 살아나게 하는 음식 그것이, 바로 사찰음식이다. 육류와 인공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조리하는 방법 때문인지 배불리 먹어도 사찰음식은 속이 불편하지 않았다.
-출처 네플릭스 셰프의 테이블 3부 1편
그때부터 내가 먹을 음식을 체계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어 먹어보자 결심했다. 그리고 사찰음식으로 마음을 정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나에게 소중한 기회를 주었고 나는 욕심이 생겼다. 나는 망설임 없이 수강 등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