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숲엔 무엇이 살고 있을까
본 편은 인터뷰이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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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를 지칭하는 '그'는 삼인칭 대명사로서 특정한 성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공연예술 분야에서 배우는 관객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위치한다.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그렇다. 배우는 플레이어(player)면서, 스토리텔러(storyteller)다. 관객은 배우를 통해 이야기를 이해하고, 극의 메시지를 알아간다. 배우의 몸짓에 웃기도 하고, 숨을 따라 참기도 하고, 슬픔에 잠긴 목소리에 눈물 흘리기도 한다. 공연예술이 이뤄지는 현장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건 관객이기도 하지만 무대 위에 있는 배우이기도 하다. 공연현장에서 배우는 그 누구보다 생생한 '주체'이다. 배우의 숲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9년째 배우 생활을 하고 있는 이를 만나보았다.
"어릴 때부터 남들 앞에 서는 걸 좋아했어요. 학예회나 축제 같은 기회가 있으면 꼭 나가서 무대에 섰던 것 같죠. 노래하고 춤추는 게 마냥 재미있고 즐거웠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재능이 많았던 그는 우연히 TV를 보다가, 뮤지컬 어워즈를 보게 됐다. 뮤지컬이라는 개념을 모르던 시기였다. 노래도 하면서 춤을 추고 연기도 하는 TV 속 사람들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이거다!'
"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하는 직업이 있구나 싶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어린 나이에는 그냥 '예술'이라고 하면 다 멋있어 보이는 거. 그때부터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연극부에 들어가 연기를 배우는데, 배울수록 더 재미있는 거예요. 내 한 마디에 관객들이 웃는 걸 보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진학도 연기 쪽으로 하게 되었고,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거죠. '배우가 되어야지!' 하고 달려온 길은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니 여기까지 와있네요."
춤과 노래, 연기, 그리고 사람. 그가 좋아하는 것이 다 '배우'라는 직업 안에 있었다. 직장인처럼 예측가능한 삶을 살 수 없고, 무대 아래서도 컨디션을 관리하며 살아내야 하는 시간들도 있지만 배우라는 직업에 후회는 없다. 내면의 에너지를 외부로 발산하는 일은 그에게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연할 때가 제일 좋아요. 연습하면서 재미있는 일도 많지만, 그래도 역시 관객이 있을 때의 에너지가 다른 것 같아요. 관객들 앞에서 에너지를 다 쏟아냈을 때는, 뭔가 개운한 느낌까지 들어요. 저 스스로가 예술을 통해 위로를 많이 받다보니, 누군가 내 공연을 보면서 또 위로를 받겠지, 생각하면 힘이 절로 나는 것 같아요. 실제로 관객분들의 그런 피드백을 받을 때가 있는데요, 그러면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마음을 다시 다잡게 돼요.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배우는 정말 값진 직업인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 그 자체가 기쁘다고 말하는 그였다. 좋아하는 일이 곧 직업이니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하지만 힘든 일이 왜 없었을까. 어려운 부분에 대해 묻자, "통장 잔고?"라며 웃는다.
"배우라는 직업이, 누군가한테 쓰임을 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일이란 게 들어올 땐 확 들어오다가도, 끊길 때는 정말 확 끊기더라고요. 그럴 땐 생각이 많아져서, 우울한 생각에까지 빠질 때도 많아요. 처음엔 '왜 날 안 찾아줄까' 하고 생각하다가 '난 도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하는 생각까지 가는거죠. 요즘엔 오디션도 정말 없거든요. 저도 저지만, 신인배우들은 정말 답답하겠다 싶어요."
일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코로나19 얘기를 안 할 수 없었다. 무대 위에서 살아가는 배우에게 공연장의 문을 닫는 일은 여러모로 타격이 컸을 터. 실제로 많은 배우들이 새로운 삶의 자리를 찾아 떠나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배우로서의 삶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저도 코로나19 때문에 일이 끊기긴 했는데, 그만 둘 용기까지는 없었어요.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하고, 아직까지는 이게 더 좋기도 하고. 그래도 이 시기에 공연장을 찾아주신 관객분들 때문에 공연계가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방역수칙을 잘 지켜주신 덕분에 공연장 내 전파감염도 없었고요. 앞으로도 느슨해지지 않고 이렇게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제 9년차 배우. 코로나19 말고도 많은 일들을 겪어왔을 연차다. 수많은 무대에 서면서, 그만의 독창적인 방법론과 시각이 생겼을 시기이기도 하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와 지금, 무엇이 가장 크게 달라졌을까.
"어릴 땐 뭐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열정이 정말 가득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대극장 오디션을 보면 하고 싶은 역할을 모두 다 체크했어요.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연차가 쌓이니까, 내 이미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고, 에너지를 분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역할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지원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맞는 역할을 찾고, 그런 역할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배우로 살다보니까, '배우는 꼭 이래야 된다' 이런 건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어렸을 때는 그런 것들이 많았죠. 멋있게 보이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걷는 연습도 하고, 똑똑하고, 대단하게 보이려고 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내 자신을 잘 보여주면 되는 것 같아요. 인물을 만나게 되면, 인물이랑 나의 접점을 찾아야 되거든요. 그러면 나 자신을 많이 알아야 되고, 내 이미지가 어떤지,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잘 관찰해봐야 해요."
가끔 그는 모니터링 영상을 보면서도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고 한다. '나는 왜 그 지점에서 저렇게 표현했을까', 하며 깊은 생각에 빠지다보면 언젠가 깨달음 비슷한 것이 찾아온단다. '아, 내가 이래서 그렇게 표현을 할 수도 있었을까?'
"당신의 숲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뻔한 이야기일 것 같아 조금은 망설여지는데요, 저는 가족이요. 평소에 가족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라 영향도 많이 받아요. 물론, 그 중엔 예술적인 영감도 있죠. 그냥 가족이 저의 '쉼' 그 자체인 것 같아요."
뻔할 것 같다고 했지만, 자신의 숲에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이야기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배우라 그런 것일까. 늘 사람들 속에서 숨쉬고, 사람들 앞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업을 가진. 사람 냄새 나는 공연이 가장 좋다는 그는, 인생의 모토가 '즐겁게'라고 한다. 아등바등 열심히 해도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지만, 즐겁게 해도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이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공연들이 다양하게 많았으면 좋겠어요. 대학로 공연도 흐름을 많이 타는 것 같아요. 어떤 주제의 극이 유행이면 그런 주제의 극들이 많이 나오고, 어떤 형태의 극이 인기를 얻으면 그런 형태의 극들이 또 대부분이고. 한 시기에 다양한 주제와 형태의 공연을 경험할 수 있는 있으면 관객들에게도 더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