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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탐방 프로젝트] 음악감독편

음악감독 이건희님의 숲을 찾다



자기만의 숲을 찾아가는 이야기, 숲탐방 프로젝트

- 음악감독편 - 




인터뷰이를 지칭하는 '그'는 삼인칭 대명사로서 특정한 성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공연에서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특히 연극이나 뮤지컬에서의 음악은 장면의 무드를 결정하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음악은 때로 연출의도나 메시지 그 자체이기도 하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니 음악감독의 존재 없이 공연을 생각하기란 어렵다. 공연 파트에서 음악감독은 프로덕션 초반부터 함께 작품을 만들어간다. 들려오는 감각 파트를 온전히 담당하는 사람, 음악이라는 언어로 극을 이끌어가는 '음악감독'을 만났다.


"원래는 영화 분야의 작업을 주로 해왔어요. 음악극 형태의 작업을 작년에 처음하게 되면서 영역을 넓힌 거죠. 제가 '영화 덕후'지만 한땐 '연극과 뮤지컬 덕후'이기도 했거든요. 2011년에 <레드>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는데요, 사실 극에 대한 정확한 감상은 기억이 잘 안나요. 그렇지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느꼈던 그 감정은 아직도 생생해요. 작품을 보고 느꼈던 신선한 충격, '예술이란 무엇일까' 하고 끓어오르는 마음, 정말 강렬한 에너지였어요. 그 현장에서 받았던 에너지를 이제 제가 나눠줄 수 있다니 참 신기하죠. 제가 좋아하는 분야의 작품을, 제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기도 하고요."


연극 <사랑 Ⅱ>(연출 박본)를 통해서 그는 공연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그 전에는 주로 영화 작업을 해왔던 그였다. 우연한 기회로, 그는 뢰슬러 벤(Roessler Ben) 음악감독과 함께 작업하게 되었고 처음치고는 조금 독특한 극을 맡게 되었다. 기존의 '연극'이나 '음악극'이라는 말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을 만큼, 오묘한 작품이었다. 그러다보니 작업방식도 기존의 작품들과는 조금 달랐다.


<사랑Ⅱ> 공연장면 (출처: 국립극단)


"<사랑 Ⅱ> 작업은 공연 분야에서도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이라 들었어요. 음악조감독으로서 리서치 기간에 상주멤버로 함께 했었는데요, 그 기간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K-드라마, K-푸드, K-팝 등 다양한 분야를 리서치하면서 함께 스크립트를 만들어나갔죠. 정말 말 그대로 공연을 같이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었어요. 실제로 연출님이 그 기간에 포착한 배우들의 성격이 캐릭터에 많이 반영되기도 했어요. 현장 자체가 재미있고 또 편안했죠."


한 달 남짓하는 기간 동안, 리서치를 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대본과 악보를 만들고, 연습하는 일들이 모두 이뤄졌다. 리서처로서는 아이디어를 내는 재미있었지만, '음악조감독'의 역할에 집중하면서는 굉장히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음악감독인 벤이 입국하는 데도 많은 절차와 시간이 따랐다. 벤 감독이 자가격리하는 호텔방에서 음악을 만들어내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벌어졌다.


"대본이 나오자마자 음악이 만들어지고, 저는 벤 감독에게 음악을 받아 다시 악보 정리 작업을 했어요. 그러곤 리허설이 바로 시작됐죠. 모두가 작업 스피드를 높이는 시간이었지만, 아마 배우들이 가장 힘들었을 거예요. 짧은 시간 안에 대사를 숙지하고, 음악을 익히고, 동선까지 체화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저도 리허설을 하면서 강도 조절을 하게 되더라고요. 특히 무대 셋업 이후 리허설을 할 때부터 공연 초반까지는 연습강도를 무조건 세게 올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음악을 소화시키는 것이 저의 역할이니까 매 순간 적절한 강도를 설정하려고 노력했어요. 그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 지금 와 생각해보면 조금 어려운 작업이긴 했네요."


아이디어도 없던 '무'의 상태에서 실체화된 공연이 탄생해 '유'의 상태가 되었다. 본디 창작은 그의 업이지만,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함께 호흡하며 공연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처음이었다.


"공연화되는 과정을 보면서 제가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이 뭔 줄 아세요? '이게 되네'였어요. 아이디어가 그대로 대본에 반영되고, 상상만 했던 그림이 무대화되고, 악보로만 존재했던 곡을 실제로 배우들이 부르고 있고. 짧은 시간 동안 이 모든 것이 실제로 구현되었다는 것을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죠."


리서치부터 함께 시작한 창작진이었지만 공연이 올라가도 그의 역할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 모니터링을 하면서 공연의 음악적인 파트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추가로 연습이 필요할 때는 다시 연습 진행을 맡기도 했다. 작품이 완전히 끝난 지금, 그에게는 이 작업이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


"한때는 공연을 좋아하는 관객이었는데, 그 공연을 내가 만든다는 게 정말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이제 공연으로서도 내 작품이 있다는 것이 좋죠. 여러 면에서 <사랑 Ⅱ>는 잊지 못할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제게 공연이 도피처가 되어준 시기가 있는데, 누군가에게 이 공연이 그렇게 재미있고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작품에 흠뻑 빠져 일하는 그를 상상했다. 자연스레 질문이 떠올랐다. 그는 어떻게 음악이라는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어떻게 음악이란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게 되었을까.


"어렸을 땐, 연주자를 꿈꿨었어요. '재즈피아노 퍼포머(performer)'가 되고 싶어서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를 했죠. 그런데 하다보니 저는 퍼포먼스 자체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워낙 쑥스러워해요. 그 앞에서 조그만 실수라도 하게 되면 정말 오만 가지 감정이 다 들더라고요. 주로 안 좋은 감정들이죠. 그래서 연주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접었죠."


이후, 그냥 좋아하는 음악을 더 파고 들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고, 아르바이트로 자금을 모아 보스턴으로 유학을 갔다. 영화음악을 전공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작업을 하면 할수록 더 재미있는 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은 것이 저에게는 아주 큰 경험이었어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기보다 원하는 것을 선택했을 때의 만족감이 정말 크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그 이후로 더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조금이라도 하기 싫은 마음이 들면 지속할 힘이 떨어져요. 반면에,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을 때의 만족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물론 만족스러운 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일이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자 우울감은 그를 덮쳤다.


"요가를 하며 머리를 숙이는데, '그냥 이대로 머리를 박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는데 그때는 정말 심각했었다니까요. 특히 한국인들이 자기 스스로를 PR하는 데 익숙하지 않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프리랜서로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거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들어오는 일만 하지 말고, 스스로 일을 찾아나섰죠. 여기저기 메일도 보내보고, 자기 PR을 했어요. 처음엔 어려웠는데 이젠 일상이 되었네요."


그렇게 시간은 지나, 어느새 5년차 음악감독이 되었다. 그새 단단함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고 말하는 그였다.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단다.


"직업만족도는 정말 높아요. 늘 높았어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으니까요. '덕업일치'죠. 그렇다고 해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 얼마를 버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해도, 이 정도로 낮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거든요. 일이 없을 때는 당연하고, 일이 있을 때도 불안함이 사실 있어요. 그럼에도,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음악감독은, 음악하는 그 작업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인 것 같아요. 그리고 작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계속 그 작업을 생각할 수 있는 애정이 있으면 더 좋겠죠. 그 애정이 있어야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으니까요."


당신의 숲엔 어떤 것이 있나요?


"전 사실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해요. 저만의 숲에서 저는 가만히 있으면서 에너지를 받고 충전을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저런 생각도 하면서요. 어렸을 때부터 저만의 세계가 늘 있다고 생각해왔거든요. 친구를 두 시간 동안 기다려본 적이 있는데 화가 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가만히, 제 세계 안에서 있는 게 저는 좋아요. 최근에 쉴 틈 없이 바쁜 기간이 있었는데, 너무 슬프더라고요. 가만히 있는 시간이 없어서요. 빈틈이 생겨서 가만히 앉아 생각할 수 있게 되니까 그제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를 늘 여유롭게, 바쁘지 않게 살게 하려고 노력해요."


자신만의 세계에서 그는 어떻게 있을까. 가만히 있는 거라고 그는 말했지만, 난 그가 꼭 그 세계에서 유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자유롭고, 또 여유롭게, 그만의 세계에서 그는 어디까지나 헤엄쳐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헤엄쳐 나아가는 지점은 어딜까. 자꾸만 더 궁금해진다.


"원래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좋아해요. 사회에 무엇인가 목소리를 던지는 게 예술의 역할인 것 같아요. 하지만 큰 메시지는 없어도 혐오나 차별을 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 없는 작품을 해나가고 싶어요. 나와 다른 것을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시선이 사회에 너무 만연하잖아요. 그런 시선들에 묻혀서 무신경하게 지나가는 부분이 없도록, 그렇게 작품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누구도 그 작품으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없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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