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블리쌤 Jul 19. 2024

마이크만 잡으면 달라지는 교사?

평소에 난, 샤이 가이(shy guy)다.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말이 없다.

심지어 쌤들이 대화에 집중하실 때마다 혼자 음악을 들으며 앉아 있기 일쑤다.

학년실에 유일한 남자라서가 아니다. 

단지 말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수줍음이 많은 캐릭터다. 

내 옆에 앉으시는 건 마다하지 않지만, 함께 밥 먹으러 가자고 얘기하기 쑥스러워서 혼자 밥 먹으러 간다. 사교적이지도 않으니 인맥도 넓지 않다. 학교 내에서 활동 반경에서만 주로 존재한다.

 

그런 내가 아이들 앞에서 수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내가 수줍음이 너무 많고 완전 내향인이라고 하면 모두가 의아해 한다.

그게 나의 '페르소나'다.

그 페르소나가 지금은 다른 교사들, 학부모님들 앞에서도 강연할 때에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마치 <지킬 앤 하이드>를 오가는 것처럼...

 

선배쌤 한 분은 무대 위에 설 때 가장 극적으로 변신하는 사람으로 나를 지목하셨다.

부장회의나 회식에서도 난 거의 침묵을 지킨다.

친해지려는 의도가 전혀 없게 보일 정도다.

그런데 무대에 세워놓으면 랩하는 것처럼 말을 쏟아낸다고 한다.

무대에 설 때, 심지어 교실 수업할 때도 난 마이크를 쓴다. 목이 아파서다.

 

한 학기가 마무리되고 있다.

어제 식사할 때 학년 쌤들이 내게 고마워하셨다. 새로 옮긴 학교에서 생존(?)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학년초부터 첫날 해야 할 일과 이후의 로드맵 등을 명확하게 정리하여 자료까지 준비해 주었고, 선생님들의 업무부담을 최소화하려 애썼다면서...

벌써 내가 만기되어 떠날 내년이 걱정되신다고... 

부장자리에 있으니 이런 칭찬도 듣게 된다. 선생님의 말씀들이 진심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도 담임쌤들의 협조 덕분에 꿈에 그리던 학년 전체 아침영어단어시험, 아침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 분이라도 반대하셔도 성사될 수 없었을 텐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부족한 초보 중3 부장을 존중하시는 선생님들의 보살피심과 지지해 주심이 매 순간 감사했다. 

새롭게 실시하는 학생주도 입시도우미 체제에도 뜻을 모아주셨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일들은 담임쌤들 패싱하듯 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전체 안내를 하는 것에도 불평을 얘기하지 않으셨고, 졸업사진 간소화 등의 변화에도 응원까지 보내주셨다. 

학년말처럼 비장할 건 아니었지만... 이미 난 너무 많은 은혜를 입은 것 같았다. 

내년을 걱정하는 건 담임쌤들만은 아니었다. 

 

학기말 학년 협의회를 앞두고 기획쌤이 내게 부장으로서 한마디 하실 거냐고 해서... 쑥스러워하는 거 알면서 왜 그러시냐고 했었는데...

 

기획쌤은 다음날 집에서 마이크 장난감을 가져오셨다.

교사 강의할 때 마이크만 잡으면 말을 시작하고 심지어 말이 많아지기까지 하니 마이크를 쥐여주면 침묵을 깨고 말을 할 것 같다고...

그 맥락을 잘 알고 있는 학년 담임쌤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리셨다.

그걸 학교에까지 가져온 정성과 센스에 모두 감탄했다. 

앞자리 쌤은 이건 블로그에 안 쓸 수 없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바로 썼다. 

 

마이크를 잡아서가 아니라... 

내게는 수업과 강의가 모두 무대라는 사실.. 마이크는 거들 뿐...

마치 배우들이 연기를 하기 전에 대본을 외우고 연습을 하면서 준비하는 것처럼, 

쑥쓰러움과 내향적인 성향을 이겨낼 만큼 수업연구를 하고 강의 준비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다들 알고 계실 것이니 예능에 다큐로 대답할 이유는 없어서 나도 그냥 함께 웃기만 했다.

그런데도 선생님들의 응원 같은 분위기가 페르소나가 아닌 본연의 모습에서도 대인관계의 편안함과 좀 더 성장할 수 있는 사교성의 가능성을 끌어내 주시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모든 게 감사한 한 학기였다. 

나이가 충분히 들었어도 3년간 부장 안 하고 담임만 하던 내가, 말년 병장과 같은 마지막 해에, 더 피할 수가 없어서 확신 없이 받아든 학년부장이었는데...

학년부장의 임무의 대부분은 때로 내 대변자 같은 역할과 내가 말로 옮기지 못한 생각까지도 알아서 말로 구현하면서 일을 추진하시는 기획쌤을 비롯해서 담임 선생님들의 협조와 지지의 지분으로 이뤄진 거라는 것을, 적어도 이 학교에서 이 멤버의 학년 구성으로는 확실히 그러하다고 확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학기 고입과 관련해서 본격적인 중3 부장으로서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다음 학기는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학기이기도 하지만, 이 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이기도 하다. 

4년 동안 다녔던 그 길을... 이제는 마지막 계절과 달과 하루를 그렇게 작별하듯 보내고 있다. 

살아가는 매 순간이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게 되길 기대하며...

작가의 이전글 그래도 기본부터(Feat. 박태웅의 AI 강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