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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gineer Apr 11. 2022

BC(before corona)AC(after cor)

코로나 시대의 횡설수설

세상에는 아직도 지구가 평면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만든 지구 평면 학회라는 단체도 있다고 한다. 몇 년 전에는 북미주 학회까지 열었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런데 IT기술의 발달로 인해 디지털화된 현재 세상에서는 지구는 평면이나 다름이 없다. 지구의 궤도를 돌고 있는 수많은 위성들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음성과 화상 통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통신을 가능케 하는 마이크로웨이브는 일직선으로 움직이지만 위성들이 방향을 바꿔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도 교신이 가능한 것이다. 즉 마치 지구가 평면인 것처럼 교신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지구 평면화는 코로나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자택 근무를 가능케 했으며 아시아, 유럽 등지에서 열리는 학회에도 여행 갈 필요 없이 책상에 놓인 컴퓨터 한 대로 화상학회에 참석할 수도 있다. 또한 집 거실 벽에 걸린 스마트티브이 앞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고 서울 거리를 활보하는 유투버들을 통해 서울 거리들을 실시간 구경할 수도 있다. 지난겨울 어느 유투버가 서울에 내린 폭설을 맞으며 실시간 방영을 하는 덕분에 마치 나도 함께 폭설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을 느끼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60년대 서울에도 눈이 그렇게 많이 왔던 기억들이 있다. 실제로 눈이 많이 왔는지 어린 시절이라 눈이 많은 것으로 착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냥 눈을 맞으며 동네 친구들과 즐겁게 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추억을 더듬다 보니 이야기가 3000포로 빠졌다. 정작 하려던 이야기는 코로나로 인해 달리진 세상 이야기이다. 뉴욕타임스 기고문에 BC(Before Corona), AC(After Corona)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어원의 임자가 그 기고문을 쓴 작가(T. Friedman)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BC(기원전)와 AD(서기)를 연상케 해서 흥미로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BC시대는 2019년도 에 종결되었고 2020년부터는 AC1년이 되어 2021년의 우리는 AC2년에 살고 있는 셈이다. 


AC시대의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살고 있다. AC1년 어느 날 하루는 사망이 출생보다 많아 그날 하루 잠시지만 전 세계 인구가 줄어든 날이 있었다 한다. 한국도 AC 1년에 출산 계획을 했다가 코로나로 인해 미룬 것이 출산율 감소에 영향을 주었고 결과는 사망이 출산을 앞지르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으로는 팬데믹이 끝나면 출산율은 회복될 것이라 하나 BC시대에 이미 미미한 출산율로 인해 더딘 인구 증가를 겪고 있는 한국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가져 올진 불투명하다. 


내가 살고 있는 토론토시 부동산의 앞날은 AC시대엔 어떻게 변화될지 예측이 잘 가지 않는다. 수많은 오피스 근무 직종이 출퇴근 대신 자택 근무로 바뀐 지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토론토 다운타운에 모여 있는 많은 고층 빌딩의 엘리베이터가 멈춘 지 오래되었고 그 주변의 식당, 카페 등 들이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그 일 년 동안 여러 기업들은 자택 근무의 업무 효율이 오피스 근무의 효율과 별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고 팬데믹이 끝나도 자택 근무의 형태로 지속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자택 근무는 대량의 오피스 임대도 필요 없게 되어 비용 절감의 혜택까지 누릴 수 있게 된다. 결국 팬데믹의 종결과 관계없이 자택 근무를 선호하는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생겨 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리되면 토론토 다운타운 오피스 건물들의 공실율은 점점 늘어날 것이며 주변의 비즈니스들도 회생할 기회마저 잃게 될 것이다. 대대적인 비즈니스 구조 변경이 없이는 토론토 다운타운은 고스트타운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의 과대망상이길 바라지만.. 


나 또한 AC1년 동안 BC 시대에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방문하던 사업 관련 회사들을 한 번도 방문 하지 못 한 채 화상 통화나 커퍼런스 콜로 일 처리를 한다. 법적으로 사인을 해야 하는 서류마저도 화상통화로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인을 하고 있다. 모든 생필품은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철저한 비대면 배달 방식으로 조달받으며 살고 있다. 불과 20여분 거리의 양로원에 계신 어머니와, 같은 도시 안에 살고 있는 자식들과도 화상 통화로 잠시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게 AC의 현실이다. 팬데믹으로 철저하게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상과 소통하고 있으며 큰 불편 없이 삶과(육체적으로, 정식적으로는 심각 수준으로 가고 있겠으나)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다. 


디지털화로 평면 화된 세상은 인간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들의 움직임을 편리하고 빠르게 만들었고 지구 반대편 중국이란 나라의 변방 우한에서 생긴 바이러스마저 인간들의 움직임을 통해 급속도로 온 세계에 전파되었다. 바이러스가 발생한 지 불과 몇 주 사이에 지구 반대편의 뉴욕시티를 초토화시켰고 이태리의 북부 지역을 저승사자들의 만찬처럼 만들었다. 결국 인간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발달된 지구 평면화는 삶을 파괴하는 바이러스들 한테도 동일한 혜택을 준 결과를 초래했다. 숙주 몸속으로 침투하기 전까지 바이러스는 죽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기이한 형태를 지닌 단백질과 DNA합성물에 불과하지만 한번 숙주의 세포 안으로 침투하면 강력한 생식 본능 지닌 괴물처럼 신속하게 개체수를 늘려 간다. 마침내 인간의 몸속에 침투해 새로운 형태의 변종 바이러스로 교묘하게 진화하는 요술까지 부리며 인간 사회를 공포와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디지털화된 문명은 바이러스를 이겨 낼 유일한 희망인 백신의 개발도 10년에서 일 년으로 단축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다.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개발된 백신을 두고 어떻게 10년이나 걸리던 백신이 단 일 년 안에 만들 수 있는가에 각종 불신의 의견들이 분부하다. 백신 개발의 과정이 아날로그 방식에서 슈퍼컴퓨터와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 등의 디지털화된 획기적인 기술로 인해 데이터 분해와 해석이 광속도로 빨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빨라진 기술로만은 모든 백신이 쉽사리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백신 만들기는 여전히 아주 어렵다 한다. 그러기에 아직도 HIV나 말라리아의 백신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매일 아침 전 세계 국가의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을 실시간 업데이트하는 Roylab Stat의 바이러스 현황을 체크하는 일이 나에게 일상화되었다. 팬데믹 초기부터 꾸준히 최대치의 확진자와 사망자를 산출하는 1등 국가가 미국인 것이 의아했다. 세계 최고의 강국이며 부자나라인 미국이 어째서 가장 치욕스러운 팬데믹 피해 1등 국가인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미국 학자 M. Gelfand의 저서에 실마리가 있었다. 저자는 인간 사회는 두 가지 culture/사회성, 문화 가 존재한다고 밝혔다. 느슨한 사회성/문화와 응고된 사회성(강제적이던 자발적이던)인데 미국은 아주 느슨한 사회성의 극치이며, 반대로 중국, 싱가포르, 오스트리아들은 응고된 사회성의 국가들이다. 중국이야 공산국이니 당연하고, 싱가포르는 민주주의 형식을 띤 경찰국가, 오스트리아는 세계 2차 대전 후 미국과 소련 두 강국의 영향을 벋어 나기 위해 스위스를 모델로 중립을 택했고 정부는 국민들을 엄중하게 통제하고 있다. 


미국의 느슨한 사회성은 국민들에게 최고의 자유, 상상력, 아이디어, 등을 누리게 했고 이는 미국을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드는데 필요한 과학, 예술, 체육, 문화 등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이러한 느슨한 사회성은 상황에 관계없이 개인의 자유만을 가장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여 팬데믹 같은 유사시에도 주위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부류들이 생겨났고, 이러한 사회성과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찬 트럼프 대통령의 무능으로 인해 코로나 팬데믹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고 말았다. 자아성찰이(?) 없는 무절제한 자유는 양날검이라는 위험한 무기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아닐까 한다. 지역적으로 한반도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으로 둘러싸여 5000여 년의 긴 역사지만 늘 외세의 위협에 노출된 세월을 살아왔다. 그런 위협이 한국인들에게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이미 1000여 년 전부터 한 민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살아왔고 국가 위협 시에는 항상 이 민족성이 그 진가를 발휘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어느 학자가 밝혔다. (민족성이란 말이 올바른 표현이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얘기하려던 것은 코로나 팬데믹에서 나타난 한국인들의 social cohesion : 사회적 결속, 구글에 의하면). 즉 팬데믹을 이겨내기 위해 한국 국민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사회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유연성을 보여 주었고 이런 유연성 때문에 팬데믹을 잘 이겨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사회적 결속력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정치는 용납하지 않는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최고의 가치인 모든 파워는 국민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 역사까지 이루었다. 자화자찬이 아니다. 미국의 유력지 워싱톤 포스트는 미국인들은 한국 국민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는 사설을 기고했다. 이제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시아의 넘버원이 아니라 전 세계의 넘버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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