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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un 28. 2022

에이미

나는 그들에게 새로 배워 익혀내야 하는 언어가 되었다. 

언어의 이름은,


"에이미는 어때?" 


글렌지라는 이름의 소녀가 내게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에이미라는 이름만큼이나 촌스럽고 롱런하는 이름이 없다더라. 

이름이라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좋아."라고 대답했다. 


그 이름의 뜻이 사랑스럽고 어여쁜 사람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알고 내게 주었을까, 이 이름의 뜻을. 

작은 소녀에게 연락할 길이 없다. 


이름이 하나 더 생겼던 날. 


그리고 아무도 내가 살아왔던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았던 그 해, 그곳.


이방. 

'모름'이 존재하는 곳. 


섣불리 나에 대해 규정하지도 어떤 판단을 내리지도 아니 하는 곳. 


나에 대한 '앎'이 무지가 되는 곳이었다. 


그렇게 이름이 다시 주어졌다.



동여매 놓은 자물쇠를 열었다. 쇠로 만들어진 루바를 손으로 밀어 교회 입구를 활짝 열었다. 손바닥에 붉고 검은 녹기들이 묻어 났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는 홀로 돌고 있는 실링팬이 공간의 적요를 더하여 주고 있었다.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교회는 그 곳 사람들에게 그런 역할인듯했다. 홀로 돌고 있는 실링팬. 유난을 떨지 않는듯 했고, 적당한 바람을 일으키지만 더위를 해갈하여 주진 못하는. 하지만, 홀로 돌고 있는. 그런 역할을 자처하는 듯했다. 


쌓아올린 하얀색 간이 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가만히 서있다가, 발닿는 거리에서 이름모를 노란꽃과 맑은 풀잎색의 꽃병을 사서 돌아왔다.


실링팬을 멈추고, 소래기 처럼 생긴 대야에 물을 담아왔다. 열린문으로 아이들이 하나씩 모여들어왔고, 맨발을 벗은 나 때문인지 신을 벗고 내 옆으로 다가 왔다. 


그들은 수줍음에 어깨를 저마다 들먹이는 듯한 모양을 하며 눈을 마주쳤다. 


이 모든 처음의 마주함이 쓰리고 따가웠던 이유는 

남김이 없이 아름다웠고  그로인해 남김이 없이 다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봄의 볕에 눈을 찡그리듯,

여름의 볕에 살가죽을 태우듯, 

이유가없어

좋았기 때문이다. 




(2)


비행기에 오른 후 시작된 여정은 꽤나 길었다. 


여행 속에서 겪게 되는 아픔은 시간이 지나며 그 탄성의 정도가 빨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몽골과 인도, 두 나라 중 한곳에 정착하고 싶었지만, 

몽골의 겨울과 인도의 여름을 견뎌 낼 힘과 해낼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건 없었다. 


나는 필리핀을 선택했다. 

돌아보니, 쉬운 선택이 되리라고 여겼던 나의 과오가 경험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의 교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은 머리가 희끗한 선교사님 한 분이, 웰컴과 함께 내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들고 공항에 나와계셨다.


"우리는 항구 도시에 있는 한 마을로 향할거에요. 거기서 지낼 수 있겠어요?"


'그곳에서 시간이 지나가도록 둘 수 있겠어요?'라는 물음. 

지낸다는 물음은 그런 것이었다. 


머무를 곳을 정한다는 것은 그런 것과 같았다. 


유랑하는 삶에 혼란과 자유가 공존한다면, 정착한 삶에는 익숙함과 시간의 향방에 대한 앎이 있어야 했다.


뜨겁고 건조한 날씨를 통과하여 들어간 단초로운 건물 안, 별다른 감흥을 주진 못하는 회색 콘크리트 벽을 기어오르는 도마뱀의 모습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생존하려는 그들의 방식은 꼬리를 절단하기 이전에 적을 유인하는데 *긍경(肯綮)이 있다고 나는 줄곧 생각해왔었는데, 가까이에서 그리고 자주 그 모습을 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피식하고 자잘한 웃음을 보내었던 기억이 있다. 


도마뱀에게 있어서 삶의 보루는 분명 그 자신일 터이고, 자신을 지키려 일생에 단 한번 하는 행동은 역설적이게도, 꼬리로 적을 자신에게 불러 들이는 것이다. 


삶에 있어, 과단성은 지나치지 않는다면 용기와 지혜를 동시에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겁이 많은 나는 역설적이게도 선택에 있어 망설이진 않았다.




(3)


"이름이 뭐야?" 

신기하지. 그냥 그게 다였다. 

어디 사는지, 직업이 무엇인지와 같은 알맹이 없는 것들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런 것들로 나에 대한 무언가를 정의 내리려 하지도 않았다. 


설령, 내가 어디에 사는 누구이며, 내 직업이 무엇이며, 내 아버지는 누구이며, 내 어머니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등을 이야기해준다 해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과 나의 교차점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들에게 그저 이방인이었을 뿐이었고 머무르다 사라질 존재 같았다. 


그랬기 때문에, 기뻤다.


그들에겐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어떤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또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그들이야말로 내 존재의 전부를 물어봐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있는 그대로의 이름이 궁금했다면.


이름 위에 올려진, 내가 가진 어떠함이 아닌. 


이름 안에 있는 나. 


(4)


예상한 대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고통은 어쩌면 변해버린 환경에 순응하는 조건반사가 아닐까. 살아가며 터득하게 된 몸의 반응 같은 것. 


아파야 산다.

살려면 아파내야 한다.


메리는 수건을 물에 적셔 나를 닦아 주며 말했다. 

"아마도 이렇게 한번 아프면 더 이상은 안 아플 거야."


지혜라는 것은 암기하거나 가르쳐 주므로 체득할 수 없다. 

필히, 경험하여야만 자신의 것이 되는 것. 지식과는 다른 것. 훙내 낼 수 없는 것. 


지혜. 나는 그녀의 말을 믿었다.


(5)


시멘트로 덮혀진 고르지 못한 골목길,

움푹 팬 곳곳의 물웅덩이들, 

맨발로 걷는 아이들,

떠돌이 개들과 벽을 오르내리는 도마뱀, 

아릿하게 내리쬐던 해의 줄기.


마약에 취한 청년들, 앳된 얼굴의 배부른 아이, 

미장만 되어 있던 회색의 집들. 칼부림으로 소란했던 밤, 

가난과 가난이 엮여져 터를 이루고 있던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은 


눈을 감으면 마음을 일렁이게 하고, 


숨을 쉬면 감정의 손과 냄새의 줄기가 온몸을 더듬어 휘감아 나가게 한다. 


이토록 진하게 베여있는 어떤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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