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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un 30. 2022

에이미(2)

(6)


가르쳐준 이름은 각기 다른 발음으로 되풀이되어 돌아왔다. 


서로를 바라보는 웃음에는 수줍음이 잔뜩 들어있었다. 


적어도 이곳에선 쓰이질 못할 이름같았다. 


"에이미는 어때?" 


철수, 영희 처럼 흔하고 촌스러운 이름을 받아놓고 기뻤던 이유는 부르기 쉬워서였다. 

부르기 쉬운 이름은 돌아보기 쉬울 테니깐. 

아이들이 내 이름을 쉽게 불러주고, 나는 쉬이 그에 반응한다면 좋은 이름일 것 이라는 단순한 생각은 다행히도 들어맞았다. 

그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은 부단히도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와 너를 구분한다는 것이고 너를 안다는 것이고. 너의 세계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른다 해도 전혀 거리낌이 없을 수 있다는 것.

에이미라는 이름은 그랬다. 내게 처음이었고 내가 가진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다정히 불러도 상관없었다.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내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의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이 만들어 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부르고, 돌아보면. 스토리는 만들어질 뿐이었다.


나이를 한두 살 점점 먹어가면서 "유정아"라고 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 이름을 다정히 부른다는 것은 나의 부분을 공유해온 사람.


아이였을 때에는 나누고 함께 가지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커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름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유정아,라는 부름이 너무나 쉬웠으나 


그 이름의 무게와 헤아림의 정도가 깊어질수록 나누어 가짐이 쉽지 않을수록 이름 또한 무게라는 것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점점 나는 -씨,-님 이러한 높임의 표현을 받게 되거나 역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7)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 또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완전한 이방인이 되기로 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야.'라고 소개 할 필요도 없이 그저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 할 수 있었던 시간.

삶에 있어 나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가며 나는 나를 발견해야 하는 것인데, 이미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진 않을까. 

서투른 사람들의 나를 향한 서투른 해석을 가끔 들을 때면, 나는 속으로 조소하기도 했다. 

'진짜 나'의 존재 보다 가장 '편한 나'의 존재를 보여주는 상대가 있을 뿐이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삶의 해답일지도 모르는 이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이 가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해석하려 들 때면, 신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8)

 완공 되지 못한 3층의 건물은 비가 오면 그 존재를 더욱 확실히 드러냈다. 구름은 빨래터에서 물기를 잔뜩 물고와 우리가 머물고 있는 건물 위로 있는 힘껏 몸을 비틀어 입에 물고온 것을 토해내고 갔다. 3층부터 떨어지는 비는 2층을 지나 1층으로 떨어졌고, 그렇게 건물 전체가 바다의 세계가 되어 갔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양동이를 들고 나타났다. 


교차점. 


내 이름과 온 마을 사람들과 공유 할 수 있는 순간이 생겼다. 퍼붓는 비를 맞으며 쓰레받이와 양동이를 들고 빗물을 퍼 나르던 그 때. 

아이들은 빗물에도 신이나 첨벙거리며 놀아댔고, 분주함에 땀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이 젖어있던 내게 물놀이를 하자며 장난을 걸어왔다. 

빗자루로 빗물을 쓸고 걸레로 짜내며 온종일 건물을 오르고 내렸던 그 날. 머리부터 발 끝 까지 빗물로 다 젖은 채, 지붕에 올라 쏟아지는 폭우 속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키며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오밀조밀 모여있는 허름한 집들의 모습이 저만치 더멀어져 보였고, 그래서인지 그곳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삶은 꽤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아주 가끔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더랬다. 꿈에서 깨면 나는 내 방 침대이거나 거실 


소파위 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눈을 꾹 감았다가 떠보기도 한 기억이 있다. 


도망온 곳에서 나는 다시 도망가려고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영원한 낙토를 만들어 살고 싶었던 걸까. 또는 그런 곳이 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걸까. 


(9)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삶은 그러했다. 가장 아름다운 서술자가 되고자 애쓰지 아니하여도 되었다. 문체를 유려하게 포장하려 노력하지 아니하여도 되었다. 스토리의 전개 방식은 너무나 고유하여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다. 이방에서 온 스물 한 살의 나는 항구 도시, 어떤 가난한 마을에 에이미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그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앞으로 함께 할 ‘나’를 기대하였다.

그걸로 되었었다. 

도피처로 선택했던 그 곳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쉽지 않은 하루의 연속이었으나, 탁해지는 정신을 또렷이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잠은 달았고, 아침은 개운했다. 


이제나는, 


과거의 스토리는 불역의 것임을 안다.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써 내려가는 이가 나 자신이라면, 나는 가장 아름다운 서술자가 되어보겠다. 

문체는 유려하며 스토리의 전개 방식은 고유하여 흉내 내지 못하는 것으로 하겠다. 

살아갈 삶의 하루하루는 내가 보는 특별한 방식이므로 그마다 다른 세계를 구축하며, 하늘의 별을 헤는 밤에 신이 내게 주신 오늘도 보통의 것과 다른 것이었음을 인정하며 잠이 들겠다.


살아오며 나는 과거의 내게 연연해 하며 살아왔음을 인정한다. 

바꾸지도 못할 인생의 단편을 잡고서 오랫동안 머뭇거리거나 서성였음을 인정한다. 


새로운 이름을 가지는 것.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구분 할 수 있는 이름을 지니는 것.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 그 때의 나 처럼, 내 이름만을 궁금해주었던 그들처럼,

앞으로의 나를 궁금해줄 사람들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것과 지나온 나를 인정하여 주는 자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나는 또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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