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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옥림 Nov 04. 2021

코로나 홀리데이 10


 "자! 맛이나 보라고 고구마 좀 가져왔어."


 3학년 부장님은 나를 지나쳐 그대로 싱크대로 향했다. 흙이 잔뜩 묻은 고구마를 물로 씻어내며 말했다.


 "혼자 산다고 했지? 많이 주면 다 먹을 거 같진 않고. 조금이라도 가져가서 맛 좀 봐."

 "어이구, 부장님. 그냥 두고 가시면 제가 알아서 씻을게요."

 

 고구마는 이미 반지르르하게 선명한 자줏빛을 띄고 있었다. 서랍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옆에 들고 섰다.


 "맛있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휴일에도 나와서 일하고 있잖아. 고생 참 많아."

 "에휴, 아닙니다."

 

 부장님은 고구마를 비닐에 넣어주시고는 씩 웃고 바로 나가셨다. 언제나 본론만 말씀하시고는 휙휙 사라지신다.


 교사도 사람인지라 제각각 성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비슷한 성향이 꽤 많다. 직업적 특성 때문일까? 대부분 선생님들은 말을 1절만 끝내는 경우가 드물다. 상대방이 못 알아들었을까 봐 부연 설명을 더 해주고, 그와 비슷한 예시도 또 얘기해주시고... 대화가 짧게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주 드물게 서론, 결론을 생략하고 볼일이 끝나면 홀연히 사라지는 선생님이 가끔 있긴 하다. 병원에서 일할 때는 대부분 직원들이 그랬다. 본론만 간략히 얘기하고 얼른 움직여야 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지금은 설명하고 또 설명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이 꽤 여유를 찾았다. 농담도 많이 하고 웃는 일도 많아졌다. 표정이 밝아졌고 제 할 말은 할 줄 알게 됐다. 간호사로 일할 때는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빛을 잃어가는 눈과 시커멓게 변해가는 얼굴에 대고 방긋 웃을 수 없었다. 밤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인상을 팍 쓰고 있는 보호자, 동료 간호사, 의사 등등에게 차마 농담을 건넬 수도 없었다.


 간호사보다는 보건교사가 더 낫지요? 정말 많이 듣는 질문인데 아직도 답이 어렵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건 간호사가 낫고, 어떤 건 보건교사가 낫다. 보건교사로서 더 나은 점은 좋은 사람들과 웃으며 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병원에도 좋은 사람은 많다. 그 좋은 사람들이 함부로 웃지 못하고 심각해지는 공간이라는 게 문제지.


 팀원 하나가 일이 많아지면 간호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일을 분담한다. 가능하면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은 묵묵히 해준다.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니 일, 내 일은 없다.


 학교는 그게 안 된다. 응급 상황이 발생하고 일이 많아져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바쁘고 힘든 모습에 걱정은 해줘도 내 일은 전문성이 큰 분야라서 선뜻 못 도와준다. 가끔은 철저히 혼자가 된 것 같다. 더군다나 보건실에 혼자 있게 된다.

 

 교실 하나 크기 정도의 넓은 공간에 혼자 앉아 있으면 좋지 않냐고? 처음엔 좋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칠 것만 같았다. 5년 내내 같은 공간에서 갇혀 있다시피 맘대로 비우지도 못 하고 자리를 지켜야 한다. 퇴근 후 심장이 벌렁 뛸 정도로 운동하지 않으면 철장에 갇힌 햄스터처럼 미칠 지경이다.


 학생이 피를 철철 흘리거나 의식을 잃은 광경을 보고 난 후 보건실에 앉아 있으면 별 생각이 다 든다. 그 어린애를 내가 지켜내지 못했으면 어쩌지. 평생 안고 갈 흉터를 남겼으면 어떻게 하지. 보건실 안에서 블랙홀 하나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헤매고 있으면 문이 드르륵 열린다. 선생님들이다.


 생각의 블랙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선생님들이 나타난다. 고구마, 쿠키, 커피와 같은 일용할 양식을 손에 들고서는 멋쩍게 웃는다. 짧게라도 얘기를 나누고 크게 웃는다.


 그게 좋다. 가끔 오롯이 혼자가 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웃을 수 있다. 학교는, 웃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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