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품어온 야망의 꿈이 있었다. 언젠가 마을에서 열린 야외 영화제에서« 딸 칠 형제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젊고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집안의 가난과 불우함을 이기고 당시만 해도 여성으로서는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여변호사가 되어 불이익을 당하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모습이 너무도 감동스러웠고 멋있어 보여서 나도 나중에 커서 저런 인생을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이 생각은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점차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내기 시작해, 드디어 나의 장래의 꿈이 되었다. 당시 나의 현실을 생각할 때 그 꿈은 도달할 수 없는 낙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갈 무렵 우리 마을에 텔레비전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우리 집은 당시 엄마의 생선 장사 덕분에 그래도 시골의 여느 가정들에 비해 좀 덜 가난했던지, 어쨌든 텔레비전을 처음으로 가진 몇 안 되는 집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텔레비전이 희귀하고 신기했던 물건인 만큼 연속극을 막론하고 모든 프로그램을 즐겁게 봤는데, 특히 나를 깊이 감동시킨 것은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을 딛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거나 또는 실현시킨 청소년 및 청년들의 개인 성공 사례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이들은 주로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기업 내에 있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또 어떤 이들은 야간 고등학교를 나와 야간 대학에 진입한 케이스도 있었다. 그들의 환경이 나와 비슷한 처지였기에 더욱더 공감이 갔고 나도 그들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등학교 진학 문제를 두고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일단 내가 다니던 여중학교와 붙어있는 여고에 원서를 내놓았지만 내 마음은 도시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골의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했고, 더구나 나처럼 집안일까지 하면서 공부를 해서는 대학 문턱에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사일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헤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처지와 상황을 생각하면 암담할 뿐이었다. 우리 집이 나를 도시의 고등학교로 유학시킬 만큼 부유하지도 않았고, 내가 떠나면 누가 가사 일을 떠맡을 것인가. 다행히도 내 밑에는 여동생이 둘이 있어서 가사일은 어떻게라도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문제는 아무런 연고지도 없고 돈도 없이 무작정 도시로 올라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가 막막했다.
안일한 일상을 택할 것인가 알 수 없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모험의 길을 택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나는 결국 내 인생의 진로를 획기적으로 바꿀 결단을 내렸다. 그랬다. 나는 새로운 삶을 열망했고,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내 꿈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이것은 분명 내 운명을 바꾸고 나를 오늘에 이르게 한 내 최초의 결단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내 계획을 말씀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대로 부모님은 격렬하게 반대하셨다. 우선 내가 떠나면 누가 가사 일을 돌볼 것이며,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도시에 가서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걱정하셨다. 나는 엄마보다는 아버지를 물고 늘어졌다. 내 꿈과 내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매일 조르다시피 했다. 아버지는 내가 대여섯 살 적에 외할머니네 집에 제사 지내러 가실 때 가끔 나를 데리고 가셨는데, 그때 « 우리 영희는 나중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라고 종종 말씀하신걸 나는 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아버지는 글을 깨친 지식인 축에 드셨고, 비록 탁상공론이 심하셨지만 그만큼 아는 것도 많으셨고 항상 꿈을 이야기하신 분이었다. 아버지가 주사가 심하고 자주 폭력을 휘두르신 건 아마도 자신의 꿈과 너무도 먼 초라한 삶을 살아가는데 대한 실망과 좌절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난 아버지에게 기대를 걸고 몇 날 며칠 애원하고 설득한 결과 드디어 허락을 얻어냈다.
아버지는 대구에 있는 이모집에 데려다 줄테니까 그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까지 대구에 이모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알고 보니, 이모는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이모부가 새 부인을 얻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거의 왕래가 없었다가 최근 들어 무슨 사업 때문에 이모부가 아버지께 다시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내가 입을 옷 몇 가지를 챙긴 작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올라갔다. 대망의 꿈을 가슴에 안고. 그때가 1979년 봄이었다.
난생처음 부모와 가족을 떠나온 나, 난생처음 큰딸을 타지에 놓아두고 돌아서야 하는 아버지, 두 부녀는 감정이 복받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는데,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에 잠시 어린 눈물을 보았다. 그러자 나 역시 눈물이 앞을 가려 온 세상이 흐릿해 보이고 갑자기 혼자가 된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덜컥 들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감정 제어를 하시고 내게 꿋꿋하게 잘 살아나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시고 돌아서셨다.
당시 이모부 집에는 새 이모가 와서 낳은 딸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H대 약대에 다니는 대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아마도 부탁하셨겠지만, 이 언니가 아는 친구를 통해서 나를 야간 고등학교가 있는 공장에 넣어준다고 해서 나는 희망을 가지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대구에 도착한 지 약 2주가 지났을 즈음, 드디어 언니가 어느 공장에 면접이 있다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아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미 채용 인원이 마감되어서 더 이상 아무도 받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 답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도 실망하고 망연자실해서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런 내가 안타깝고 동정심이 느껴졌는지, 언니는 내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른 데를 다시 찾아보자고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