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중혁
이송희일 감독의 페이스북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해외에서 수입해 온 값비싼 견과류와 비싼 국내산 두부를 먹으며 자신의 결정권을 선택하는 돈과 시간을 보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햄버거 하나로 한 끼를 때우고 부리나케 노동 현장으로 뛰어가는 가난한 사람도 존재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된 채식인의 강박이 간과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세상이 선악과 시비로만 구분된다면 차라리 살기가 편하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단순 명쾌해질 테니 문제를 파악하기 쉽고 해결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별로 그렇지 않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당위성이 필요하지만 그것만 갖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절대선과 절대악 같은 게 아예 없진 않겠지만 그걸 기준으로 살아가기에 인생사는 각자의 사정과 정황과 이해가 너무나도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악’으로 규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니 대개는 상대가 ‘악’ 일 텐데, 선/악의 구도에서는 상대는 결국 제거·복종·교화의 대상이 된다. 서로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이 돼버릴 것이다. 물론 지금이 그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결국 다양한 삶과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건 정치다. 기후변화도 그렇다고 ‘일반인을 위한 기후변화의 과학과 정치’의 일곱 저자들은 말한다. “기술적인 문제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시급하고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정치의 문제다”라고.
책에는 다양한 이해관계들, 특히 국가들을 다룬다. 인도는 중국, 미국 다음으로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개발제한을 요구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 인도 같은 나라는 땔나무, 숯, 작물 잔여물, 동물 배설물 등의 전통적 바이오매스 비중이 국가 전체 에너지원의 1/4을 차지한다. 가난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는 재생에너지와 함께 석탄발전도 적극 육성한다. 당장의 가난을 탈출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국 등 선진국에 ‘이미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고 성장을 했으니 너희들이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개도국에는 지원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기후정의와도 맞닿아있다. 독일의 싱크탱크인 저먼워치가 매년 발간하는 세계기후위험지수는 세계에서 가장 기후변화에 취약한 지역으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남미를 꼽는다.
중국 역시 악명 높은 온실가스 배출국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생산된 알루미늄,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제품 등은 대부분 선진국으로 수출된다. 책은 이를 ‘더러움의 외주화’라고 표현한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국가 중심적·생산자 중심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산정하기 때문에 감춰져 있는 문제다. 저자는 묻는다. 화석연료를 추출해서 파는 국가는 온실가스 배출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을 면제받아도 되는가? 더러운 과정은 외부에 맡기고 깨끗한 완제품만 받아서 소비하는 국가에 책임을 묻지 않아도 되는가? 한국에선 미세먼지 얘길 할 때면 중국, 인도를 일단 욕하고 보지만 그렇게 단순화할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사례는 어떨까. 흔히 미국을 얘기할 때 공화당은 기후변화에 미온적이고, 민주당은 적극적인 것처럼 비친다. 지난번 트럼프의 모습을 보며 이런 인식이 더 강화된 것 같다. 하지만 책은 “미국 의회는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연방 차원의 기후변화 종합법의 채택에 부정적이거나 미온적인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며 “의회에서 법을 제정하지 않으니 행정명령 수준에서만 대응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미국은 교토의정서는 거부, 몬트리올 의정서는 비준했다. 디솜브레 미국 웨슬리대 정치학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은 사안과 관련된 국내법을 완비한 경우에만 국제환경협약을 비준한다고 설명한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내 환경법은 환경단체와 산업계 간의 절충과 합의가 이뤄져야 제정된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반드시 ‘합의’를 거쳐야 의회에서 법으로 제정된다. 대통령이 기후대응에 충실히 하려고 의회에서 민주당이 다수파가 된다 해도 국가의 전향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국내 구성원들 다수의 전향이 이뤄져야 함을 의미한다. 민주정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라는 재난을 막으려면 세계가 함께 나서야 하는데 각자의 환경이 다르다. 각자의 이기심이 작동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렇다고 서로의 상황만 이해하기에는 당장 기후재난이 코앞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후문제를 정치적으로 풀 수 있을까.
책은 기후변화의 정치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제가 해결되려면 이 이슈가 의제로 설정돼야 하는데 이는 곧 ‘정치화’다. 정치화가 되려면 크게 3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 지식, 우려, 긴급성이다. 지식은 곧 높은 수준의 ‘과학적 사실성’이다. 관련 행위자들이 환경영향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지녀야 한다. 얼핏 동떨어져 보이는 ‘과학’과 ‘정치’를 한 제목에 쓴 이유이기도 하다.
책 곳곳에는 기후변화의 과학적 흔적들을 보여준다. 한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이렇게 추운데 무슨 기후변화냐”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4장 ‘북극 온난화와 이상기후’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5장 ‘기후변화와 취약생태계’에서는 생물다양성이 얼마나 축소되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다음은 우려다. 특정 환경 문제를 많은 사람이 걱정해야 한다. 가시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우려는 더 커진다. 여기서 기후변화 해결에 어려움이 있다. 다른 자연재해에 비해 비교적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변화가 있더라도 매우 오랜 시간 걸쳐 나타난 변화다. 이 때문에 저자는 “기후변화에서는 우려가 행동으로 이어지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마지막 긴급성이다. 원전 사고가 났다거나 오염물질이 국경을 넘어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긴급성과 위험 인식이 상승한다. 기후변화는 이전보다 더 높은 긴급성을 갖게 됐다. 미국은 2005년 초대형 카트리나가 오고 2012년 샌디가 오면서 이런 일들이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고 기후변화 적응 노력이 더 강화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식·우려·긴급성을 갖고 있는가? 그래서 정치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가? 조금의 변화가 일고 있지만, 즉각적인 행동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책도 미래를 그리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책을 보면 좀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해선 우선 현실을 적확하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