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is no gender
집으로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마드리드 호스텔에서 만난 태국인 남자아이였다. 통통한 배가 아이덴티티인 그 아이를 [벨리]라고 부르겠다.
그 당시 6인실의 남자 도미토리였는데 나는 그저 사흘을 머무르고 떠났지만 벨리는 혼자 일주일을 넘게 머무르며 느긋하게 오고 가는 여행객들을 맞이했다. 벨리는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았지만 덩치에 맞지 않게 꽤나 섬세함과 순수함이 있었다.
이른 밤부터 고함을 치듯 코를 고는 이탈리아인 아저씨를 향해 "당장 다 같이 달려가서 저 사람의 코와 입을 비틀자"는 비난과 진심 섞인 농담을 던졌던 어린 나에게, “피곤하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야. 너도 나도 그럴걸? 우리가 조용히 해주자” 라며 혼자 웃음소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떠나기 전 날인 늦은 밤, 한국을 좋아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며 기념품을 교환하고 싶다는 눈치로 슬그머니 누워있는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피곤했던 나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배낭에 깊숙이 손을 찔러 넣어 휘적거리다 끌려 나온 백 원, 오백 원 짜리 동전을 대충 건넨 채 잠에 들었다. 그 뒤로의 여행 일정 속에서도 간간히 안부 정도는 주고받았는데 나중에 듣기로는 그걸 자기 집 벽에 예쁘게 장식해 놓았다고 했다.
그렇게 처음 만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나가는데 난데없이 편지가 왔다. 그것도 한국으로. 편지를 받자마자 몇 달 전,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좋은 선물을 주고 싶다며 우리 집 주소를 물어보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알려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글도 하나도 모르면서 삐뚤삐뚤 한글로 적힌 나의 집주소와 이와 대비되게 알록달록한 너무도 예쁜 우표들이 붙어있었다. 사실 이 정도는 친구라는 관계에 끼워 맞춘다면 견딜 만한 의구심이었지만 내가 더욱 의아했던 것은 이 일방적이게도 정성이 가득 담긴 손편지가 흘러오기까지 적어도 수십일은 걸렸을 것인데 나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지긋한 인내가 나를 부담스럽게 했다.
얼른 편지를 읽어보았다. A4용지 두 장 을 가득 채우는 분량이었다. 첫 장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뻤어“, ”SNS 보니까 여자친구가 생겼더라! 나도 팁 좀 줘!”, ”한국 여행도 가고 싶은데 비자 발급이 너무 힘들어“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장부터 나의 기대를 마구 패대기쳤다.
"사실할 말이 있는데, 네가 날 어떻게 생각했던지 상관없어.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지만..."
"Love is no gender, I will talk it straight...",
("사랑에 성별은 없어, 너랑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I really jealous on Covid19, They are more near to you more than me"
("코로나가 너에게 더 가까이 있으니까 질투나")
....
수많은 정성스러운 사랑고백 표현을 받았다. 나 또한 인내하며 읽고 나니 이 편지가 물 건너 나에게 오기까지 행해졌던 누군가의 수고로움들이 매우 원망스러워졌다.
오히려 사실 벨리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하루하루를 긴장하며 조급하게 기다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진심을 전하려 했던 마음이 더 컸기에 인스타 다이렉트 따위가 아닌 이 느린 러브레터를 쓰며 스스로는 더 조급해졌겠지.
오랜 시간 끝에 벨리의 진심은 이해하였지만 메신저를 통해 딱 잘라 말한 뒤에 그 뒤로 답장은 하지 않았다. 심하게 정색하지도,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진심이 느껴졌던 내용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 소름이 끼치는 내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혹시나 우리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기 전, 진심을 알게 된 것에 안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때 벨리의 뱃살을 장난스레 놀렸던 건 사실 본인에게 꽤나 상처였겠지. 미안했다.
그래도.. 퉁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