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원에서 울던 딸, 귀신으로 오해받다

그런데 귀신은 좀 억울합니다

by 써니로그

사무실을 벗어나 출장을 떠나는 길.
오랜만에 자유를 얻은 듯 마음이 들떴다.

9월의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자연은 이미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산은 은근슬쩍 빛깔을 바꾸려 하고, 하늘은 한층 맑고 투명해졌다.



출장을 마친 귀로.

문득 아버지 산소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안공원묘원.

수천 개의 묘비가 끝없이 늘어선 그곳에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같이 계신다.

그래도 외롭지 않으시겠구나 하는 생각에 위로를 얻는다.



소주 한 병, 종이컵 세 개, 그리고 새우깡 한 봉지를 챙겨 묘를 찾았다.

워낙 규모가 커서 한참을 헤맸다.

‘내가 너무 무심했나’ 하는 마음이 스쳤지만,

결국 찾아내고는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며,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그 앞에 놓인 소주병과 새우깡 봉지, 종이컵 속에는 어느새 가을 하늘빛이 가득 비쳤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가 어려웠다.

권위적인 태도,

엄마를 힘들게 하는 모습,

따뜻한 말 한마디 보다 먼저 날아드는 지적.

딸로서는 그저 두렵고 힘들었다.



그러나 설레였던 기억도 있다.

늘 지적만 하시던 아버지가,

내가 수능시험을 잘 치고 돌아온 날에

아무 말 없이 케이크 한 상자를 사 오셨던 모습,

말보다 작은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하시던 분이었다.



철이 들고 나니 조금은 알겠다.

한 집안을 짊어진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무게와 외로움을.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는 서예였다.

글씨도 그림도 잘 그리셔서, 젊은 시절엔 극장 간판도 맡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끌고 오셔서 그 길을 끝내 접으셨다.

그 후로 아버지는 붓을 놓지 않으셨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엔 팔이 아프다면서도 하루 종일 글을 쓰셨다.

그때 엄마는 “팔 아프다면서 또 쓰노!” 하고 핀잔을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서예는 술·도박 같은 게 아닌 가장 건전한 취미였는데

그마저도 잔소리를 들으셨구나 싶어 웃음이 나면서도 짠하다.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병원으로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도 설마 했다.

하지만 달려가니 이미 늦은 후였다.



딸밖에 없는 집안이라,

결국 어른들 뜻에 따라 먼 천안 가족묘에 모시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했을까 싶은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 계시니 덜 외로우실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요즘 나는 필사에 푹 빠져 있다.
좋은 글을 따라 쓰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손가락이 저리고 어깨가 빠질 듯 아파도 자꾸 쓰고 또 쓴다.



그제야 안다.
아버지가 붓을 잡던 그 손이 아팠듯,

펜을 쥔 내 도 저린다.



묘 앞에서 웃다가 울다가,

그렇게 한 시간쯤 앉아 있었다.



그때 봉고차 한 대가 다가와 옆에 멈췄다.

나도 이제 챙겨 내려가야지 하는 생각에 일어서는데,

너무 오래 앉아 있던 탓인지 쥐가 나서 다시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때 옆에서 "악!" 하길래 돌아보니

"사.. 사람 같..., 사람 맞죠?" 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너무 놀라서 주변을 돌아봤다.

봉고서 내린 듯한 두 사람과 나뿐인데?

"저요?"

그랬다. 파마기 없는 생머리에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내가...

흐느끼듯 울다... 미친듯 웃... 하고 있으니



하필 아버지의 묘가 묘원의 가장 위쪽에 위치해 있다.

시간은 또 저녁때가 다되가니 해는 점점 져가고

차 타고 지나가던 성묘객이 묘원 관리실에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하얀 소복을 입은 미친 여자가 있다며.

덕분에 눈물 쏙 들어가고

경계 태세였던 직원분들이랑 한참을 웃었다.



아버지가 나 그만 울고 한바탕 신나게 웃고 집에 가라고 보내주셨나 보다.

“아버지, 또 올게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발길을 돌렸다.

마음은 후련했고, 어깨는 묵직하다.

아버지의 삶의 무게가 내게도 이어진 듯하지만,

그 무게쯤은 다들 부모라는 이름으로 품고 살고 있을 테니.

또 그 무게가 삶의 원동력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음... 다음번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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