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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Sep 19. 2023

여신, 파티마를 40년 만에

<연금술사>를 읽고

성모 마리아께서는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수도원을 찾으셨다. 사제들이 길게 줄을 서서 성모께 경배를 드렸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시를 낭송했고, 어떤 이는 성서를 그림으로 옮겨 보여드렸다. 성인들의 이름을 외우는 사제도 있었다.


줄 맨 끝에 있던 사제는 볼품없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다.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을 배운 게 고작이었다.


다른 사제들은 수도원의 인상을 흐려놓을까 봐 그가 경배드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싶어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더니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그가 보여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다.


아기 예수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성모께서는 그 사제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272쪽)


'파티마'라는 이름을 가진 크림이 있었다. 40여 년 전에. 그 크림은 여드름에 효과가 있는 매우 값비싼 크림이었다.


고교시절 내 얼굴에는 엄청난 여드름이 작렬했었다. 너무 심했기 때문에 엄마는 나를 데리고 피부과 병원을 찾았다. 여드름은 짜도 짜도 없어지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심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 두었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당시 그냥 두기는 커녕 간호사에게 얼굴을 맡긴 채 나는 찔끔찔끔 눈물도 같이 짜내야 했다.


혹독한 사춘기였다. 그런데 나의 여드름 스토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병원에서 '파티마'크림을 처방해 주었던 것이다. 바르면 좋아질 거라는 확신과 함께.


과연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크림은 중화제 역할을 하는 다른 크림과 섞어서 사용해야 했다.


파티마를 직접 잔뜩 바르면 이놈의 지긋지긋한 여드름이 싹 사라지지 않을까? 더 빨리 낫고 싶은 욕망은 중화제 없이 파티마 크림만 듬뿍 바르도록 날 유혹했다.


결과는 드라마틱했다. 자고 나니 얼굴은 붉게 물든 노을처럼 빨갛게 부풀어 올라있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무섭게 변한 얼굴을 하고 한동안 학교를 다녀야 했다. 파티마는 내게 지옥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놀림을 감당해야 하는 그 시절을 어떻게 넘길 수 있었는지..... 너무나도 혹독한 사춘기였다.


<연금술사>를 읽다 보니 주인공, 산티아고가 사막을 헤매다가 찾은 오아시스에서 첫눈에 반한 여인이 등장했다. 헌데 그녀의 이름이 '파티마'였다. 40년 전 일을 떠오르게 하는 악명!!!


구글링을 해보니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와 카디자의 장녀이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아내, 이슬람권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유사한 역할로,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꼽힌다.


이슬람권에서 파티마란 이름이 자주 쓰이다가, 안달루스 지방에도 전해졌고, 지금까지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여성 이름으로 남아있다."


라고 소개되어 있다.  


내 여드름 치료제로 사용되었던 크림의 이름과, 산티아고가 첫눈에 반한 여인의 이름이 같은 것은 과연 우연일뿐일까?


나와 산티아고에게는 '파티마'가 구원이 될 수도 있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함정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다.


<연금술사>를 읽다 보면 책의 절반쯤은 읽어야 '연금술사'가 등장한다. 진정한 연금술사는 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대목이다.


'자아의 신화'를 좇고 '초심자의 행운'을 누리고, '은혜의 섭리'를 깨달으며 '우림'과 '툼밈'의 원리를 이해하다 보면 어느덧 우리의 인생에는 '마크툽' 즉, 운명이 나이테처럼 새겨진다.


풍파를 겪고 먼 길을 돌고 돌아 원래의 자리로 귀환하지만 '나'는 그 전의 '나'가 아니다.


파티마가 할퀴고 간 내 얼굴은 미니 분화구들로 장식되어 있다. 영원히 나를 괴롭힐 것 같았던 상처는 희미한 흔적으로 남았을 뿐이다.


닳고 닳아서 이젠 무뎌진 그 고통의 나날들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아스라한 추억이 됐다.


'파티마'탓에 나의 청소년기는 고통의 나날을 견뎌야 하는 시기가 되기도 했지만, 이후의 삶에서는 나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일에서건 중화제를 섞어서 사용하며 살아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연금술사적 생각을 해본다.


공을 기지고 노는 기술밖에 없었던 사제가 아기 예수를 즐겁게 한 것은,  어떤 일에서건 마음을 어떻게 먹는가 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우는 에피소드다.


이것저것 섞고 주물러서 금을 만들어내는 것은 진정한 연금술이 아니다. 오랜 세월 마음을 단련하고 제련하는 것이 진정한 연금술이다. 그러면 반드시 금보다 소중한 것을 얻게 된다.


파티마, 이슬람의 성모마리아와 난 40년 전에 이미 강렬한 만남을 가졌었던 거였다.


아! 나의 운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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