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평일 오후의 시간. 요즘 꽂힌 비투비의 이창섭이 부른 '365일'을 들으며 운전을 하던 중이었다. 볼륨을 높여가며 같은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한놈만 팬다는 주의인 나는 하나에 꽂히면 누구 하나 나자빠질 때까지 질리도록 그것을 취한다. 어느 날 내가 틀어놓은 옛날 노래를 아들이 가사까지 알고 따라 부르기에 너무 신기해하며 어떻게 이 노래를 아냐 물었더니 엄마가 그렇게 주구장창 트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며 절로 외워졌다는 말을 했다. 그 순간마저 철저히 어미인 나는 반복학습의 효과가 이렇게 스펀지 같이 이루어질 줄 알았다면 좀 더 학습적인 것을 틀어놓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되었다.
'우리'라는 도입부는 일순간 나를 아득한 저 편으로 데리고 간다. 대신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시작이 중요하다. 앞 소절을 조금이라도 놓치거나 다른 생각이 끼어들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듣는다. 그런 탓에 어떤 날은 노래의 전반부만 반복하여 듣다가 목적지에 다다른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온전히 듣는 것에 진심이다. 한 음절, 가사 한 자락, 멜로디의 여흥까지 마음을 다하여 듣는다. 보통 듣자마자 좋은 곡도 있겠지만 내겐 들을수록 좋아지는 노래가 더 많았다. 멜로디가 귀에 익고, 가사가 귀에 들리고, 음색이 느껴지고, 호흡이 전달되면서. 성량이나 고음보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은 그만의 음색이었다. 그를 드러낼 수 있는 매력.
나의 그런 성향은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비슷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와락 안기는 사람은 없었다. 억울하게 당한 것도 없으면서 대체로 처음부터 마냥 호의적이지않은 나는 무턱대고 말간 빛으로 다가가기가 힘들다. 문틈을 조금씩 열어가며 그들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무언가를 할 때면 언제나 차곡차곡 단계를 밟으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나의 성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여러 번 보다 보면 서서히 스며들듯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특히 선호하는 취향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유독 말을 잘하는 사람, 거기에 유머까지 있는 사람이 좋았다. 설교를 하듯 길거나 뻔한 말이 아닌 적재적소에 던지는 기깔난 멘트와 재치 있게 받아치는 티키타카. 삶에 좀 유들유들하면서도 유머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어떤 일이라도 너그럽게 대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또 마냥 웃기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 이면의 진중함은 필수다. 저런 면이 있었나 싶은 반전 매력까지 있어야 호감도가 상승한다. 내가 그런 사람이 좋다고 했더니 동생이 그런 성격미남이 어딨냐며 너무 이상적이라 했다.
다음 소절로 건너가며 어느새 나는 이별의 주인공이 된다.이제는 너무 오래된 잿빛 기억을 애써 소환하며 아련한 그리움을 느껴본다. 감정이 메말라 퍼석이는 지경인 나는 노래 하나로 잠시나마 이렇게 물결이 이는 것이 좋다.그 순간이었다. 대개 어떤 일들은 전혀 개연성 없이 일어나지 않던가. 그 순간 갑자기 왜 그가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 엊그제 이별한 사람의 노래를 듣다가 그가 생각날 일이 뭐란 말인가. 그저 감정이란 것이 저 밑바닥으로 치닫다 보면 바닥을 딛고 튕겨 올라오는 것들과 만나기도 하는데 그곳에서 과거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같이 길어 올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연락을 안 한지 오래되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많은 것을 공유하며 늘 반경 몇 미터 내에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던 친구였는데 사는 게 바쁘니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냥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좌회전을 하며 몸이 조금 기우는 시점에 좋아하는 노래를 듣다가 네가 문득 생각났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10년 만에 거는 전화치고는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는 놀라서 대뜸 무슨 일 있냐고 묻는다. '왜' 또는 '응'이라는 대답이 자연스럽던 우리는 이제 불현듯 걸려온 전화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 마음 졸여야 하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슬리퍼 끌고 아이스크림 하나 문 채 만나서 일상수다를 떨던 우리를 시간은불안이 더 익숙한 생으로 던져 놓았다.
사실 브런치를 하면서 종종 생각이 났었다. 그가 쓰는 글과 비슷한 느낌의 글을 만나면 그도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와 결이 비슷하던 그에게도 내가 풀어내던 방식이 답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브런치를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 넌지시 권하다 나 역시 그곳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거의 10년 만에 연락이 닿은 그에게 가끔 글을 쓴다는 말은 지루한 나의 일상을 조금 있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허영심에 나는 나의 행위를 쓰는 일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 보았지만 금세 후회가 되었다. 보통 지인들은 내가 그런 말을 해도 흘려듣기 일쑤고 내가 굳이 원치 않으면 집요하게 묻지 않는데 그 친구는 나의 필명을 궁금해했다.
나는 그저 쓰는 삶을 놓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그러다 우연히 이곳에서 조우하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무던히 쓰다 보면 혹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렇게 무수한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서 우연히라도 만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게다가 과거의 기억 어딘가에 멈춰있는 우리가 과연 지금의 생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혹은 어쩌면 이미 스쳐 지났을 수도 있고, 만나고도 못 알아봤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떤가. 어디선가 각자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음을 알면 되지 않을까. 가끔 글을 쓰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나의 생이, 나의 글이 궁금한 마음. 그것이면 충분하지 싶다. 그럼에도 나 역시 그의 글이 궁금하긴 하다. 가끔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오래전 익숙했던 그의 음색을 찾는데 귀를 기울여봐야겠다. 좋은 노래를 온전한 마음으로 듣는 것은 나의 오래된 취미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