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어 처음 만끽한 자유는 짜릿했고 유희는 달콤했다. 매일이 빛나는 일상이 될 것만 같았다. 갑자기 주어진 해방감에 취해 허우적댈 때면 그곳에 끝이 없는 환희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빛나는 것들이 그러하듯 짧고 강한 희열 뒤엔 더 큰 허무함이 찾아왔다. 대학 생활은 금세 지루하고 따분해졌다.
그때 친구가 자신은 그런 시기가 왔을 때 학과에 그나마 괜찮은 남자 선배를 찜해놓고 그를 보는 재미로 학교에 간다고 했다. 억지로라도 행복회로를 돌려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린다는 것이었다. 그땐 그게 뭐냐며 웃고 말았는데 어딘가에 소속되어 당연한 듯 무료함이 밀려올 때면 그 말이 종종 생각나곤 했다. 어느 곳에서나 버텨내야 하는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그 시기를 무사히 지나가기 위해 내겐 많은 날, 내 마음을 일으킬 괜찮은 무언가가 필요했다.
특히 요즘의 내겐 그런 것이 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집에서만 묵언수행하는 신랑과 문을 걸어 잠그고 자체 격리생활 중인 두 청소년은 끊임없이 내 존재의 무의미함을 부르짖고 있었다. 내 안에서 웃던 그들이 이젠 나를 벗어나 더 많이 웃기 시작했고, 같은 공간에 있을 뿐 완벽한 타인에 가까운 우리 모습을 볼 때면 공허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감정이 한 번에 휘몰아친 그때 하필 내겐 꽂히면 추적의 끝을 보고 마는 집념과 언젠가 발휘해 본 적 있는 덕질력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잠자코 있던 그것들은 마침 적절한 때에 나타나 상처받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아이돌을 내 앞에 내놓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조금 더 나이 많은 이들이 했던 말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아가는 과정일 뿐 내가 크게 달라지는 일은 아니었다. 특별히 더 성숙한 마음이 되거나 무언가에 달관하거나 초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예전 마음 그대로 나이만 먹어갈 뿐이었다. 단지 내게 주어진 역할을 과감히 벗어던지지는 못하는 중압감만 조금 더한 채로. 그래서 나이만 들었지 마음은 젊은 시절 못지않다던 어른들의 말이 갈수록 실감이 났다.
그렇게 나이 들지 않은 내 마음이 향한 곳이 아이돌이다. 나는 요즘 아이돌 덕질 중이다.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하는 시간뿐 아니라 방에서 거실로 옮겨가면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영상을 돌려보거나 노래를 듣는다. 가끔은 고요한 집에서 터무니없이 터지는 내 경쾌한 웃음소리에 내가 놀라기도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과 그런 마음을 지닌 나를 바라보는 일은 꽤 삶의 활력이 되었다.
누구의 삶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음에 파장이 일기 마련인데 요즘과 같은 환경에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취할 수 있기에 더 쉽고 빠르게 빠져들 수 있었다. 그렇게 끝도 없이 영상을 파다 보니 어느 날은 군인 시절 광복절 경축식에서 애국가를 부르던 영상까지 찾아보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행복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잘하거나 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은 늘 경이로웠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다듬어 내보내는 영상은 마음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지능적으로 풀어주는 무대 뒤 인간적인 모습엔 절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때 젊은 트롯가수에 빠져 행사장을 쫓아다니던 노년의 팬들이 이해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아이돌에 빠진 내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것은 뭔가 나이답지 못하고 철없는 사람같이 느껴져 누군가에게 당당히 밝힐 수 없는 조금 머쓱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끔 영상 아래에 40대인데 뒤늦게 입덕했다든지, 이 나이에 주책맞게 팬이 되었다는 댓글을 볼 때면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의 행보가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내가 하는 덕질이라고는 그저 좋아하는 마음을 키워가며 오래된 영상을 돌려보거나 인스타를 보거나 팬 커뮤니티를 둘러보는 정도였다. 그리고 최근 가수가 나오는 뮤지컬 티켓을 예매하는데 조금 열정을 보였을 뿐이다. (동생은 근래에 본 나의 가장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했다.)
그러다가 한 커뮤니티에 적힌 글을 보게 되었다. 그 가수는 최근에 부쩍 인기가 많아졌기에 많은 영상에 댓글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댓글에선 다양한 연령층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글은 댓글을 달 때 굳이 특정 나이대를 언급하거나 아이 엄마 또는 남편을 언급하며 나이대를 특정할 수 있는 말을 조심해 달라는 부탁의 글이었다. 팬층이 다양화되는 것은 너무 좋은 일이고 환영할 일이나 굳이 나이대를 언급하면 자칫 팬덤이 노화되었다는 인식을 줄 수 있고 그로 인해 새로운 팬층의 진입장벽이 높아질 수 있으니 가급적 셀털금지(셀프 신상털이 금지)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가수와 팬덤의 장수를 위해 높은 연령층의 팬들은 최선을 다해 본인의 신상정보를 숨겨달라는 부탁이었다.
들이치는 마음마저도, 좋아하는 마음마저도 마음껏 표현할 수 없는 나이라니. 처음엔 조금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 마음만은 아직 젊디 젊어 그대들 못지않음을 알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내가 타 가수 팬과 싸워가며 내 가수를 지키고 싶어 했던 그때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본다면 그들의 순수한 의도는 이해가 되었다. 더군다나 요즘은 팬덤의 규모가 커지고 그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가수의 성공을 이끌어내기도 하니 말이다. 가수를 아끼고 그를 오래 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말이니 그것은 결국 내가 가진 마음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나의 나이를 숨겨야 가수가 더 빛날 수 있다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곁에서 묵묵히 숨 죽인 검은 별이 되는 수밖에.
내가 흔쾌히 나의 빛을 죽이고 숨죽일 수 있는 것은 내 삶에 공허함이 찾아온 어느 날 나를 유일하게 위로한 것이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오던 가수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나의 덕질은 단지 내가 받았던 것을 좋은 마음으로 돌려주는 작은 응원일 뿐이다. 나를 당당히 밝힐 수 없으면 어떠랴. 내 조용한 응원이 전해져 오래도록 노래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시금 행복해지고픈 마음으로, 바닥으로 가라앉는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 기꺼이 나의 행복회로가 되어준 것에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