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다시 설핏 잠이 든다. 지금 몇 시쯤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참, 쉬는 날이지, 좀 늘어지게 자도 상관없지란 생각에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쉬는 날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동안 이미 충분히 깨버렸지만 늘어짐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얼마나 더 지났을까. 가늘게 끊어질 듯 이어지던 소리가 점점 선명해진다. 물속에 잠겼다 떠오른 것처럼 아득함이 밀려난다.
한 손은 읽던 페이지를 가른 채 책 위에 얹혀 있고 베고 누운 다른 팔엔 이질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다. 바닥에 닿은 머리카락은 아직 덜 말라 축축한 상태다. 건조한 공간에서 머리카락만 젖어 있는 상태는 마치 물에서 갓 건져 올려져 버썩 마른 모래사장 위에 내던져진 느낌이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상태로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얼굴에 들러붙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모든 소리가 잠든 듯 고요하다.
여름 막바지에 휴가를 냈다. 아이들은 개학을 해서 등교를 했고 신랑은 그간 사두고 뜯지 않던 택배 상자를 조용히 개봉하더니 어설픈 캠핑도구들을 챙겨 들고 홀연히 동해로 떠났다.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더 이상 계획을 돌이킬 수 없을 시점에 자신의 일정을 공표하고선 쏟아낼 말들을 다듬는 사이 달아나버렸다. 그렇게 나는 홀로 집에 남았다.
아이들의 케어를 핑계로 남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같이 떠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신랑과 단둘이 떠나는 것도, 긴 시간을 달려 여름 바다를 보고야 말겠다는 낭만도 피곤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휴식이 필요했다. 애들이 어렸다면 나에게 독박육아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는 것도, 가정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엄한데 쏟는 것도 원망스러웠겠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다정하고 친밀하지만 가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그때마다 신랑은 세상을 향해 우뚝 나아가고 나는 굴을 파고 집으로 들어간다.
나 역시 숙소를 잡고 홀로 떠나볼까란 생각도 아주 잠시 했었다. 신랑보다 선수 쳐서 먼저 떠나버렸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럴 때 보면 가끔 우리 사이가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눈치게임 같기도 하다. 이미 크고 작은 눈치게임을 몇 차례나 치르고 돌아와 집에서마저 플레이를 이어가야 하다니 씁쓸한 현실이다. 그래도 그나마 집에서는 따로 형성되는 기운이란 것이 있고 신랑도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니 그나마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앞서 움직이지 못해 잔류하게 되었지만 그냥 받아들이고 만다.
서로의 방식이 이해되지 않아 기를 쓰며 설득하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것을 편하게 인정하고 보니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엔 눈치 보듯 넘겨짚는 일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나 역시 여정을 계획하던 끝에 결국은 집이 가장 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음에도 그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고 나의 잔류를 뛰어난 모성애로 포장해 본다.
모두가 떠나고 나면 이곳은 나만의 공간이 된다. 매일 보던 곳이지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제법 낯선 공간처럼 느껴진다. 차분히 가라앉아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적막 속에서 모든 것에서 동떨어진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물론 방해하는 것들이 있었다. 엄마가 집에 있는 특권을 누려보고자 아이들은 앞다투어 아침 시간에 게으름을 피우고 차를 놓치곤 했고, 엄마라 부르며 집에 들어서는 경쾌함이 좋아 친구를 대동하고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가장 외면하기 힘든 것은 집안일이었다. 소소한 집안일은 눈에 거슬리는 것을 모두 해소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자니 끝이 없었다. 자리가 정돈되고 공간이 매만져지는 것은 짧은 시간 안에 자기 효능감을 높이는 일이어서 꽤 중독성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집안일에 매여 하루를 소진할 것만 같아 큰 것 몇 개를 해치우고 집안일의 총량을 채우는 것으로 스스로 합의를 했다. 전날엔 밀린 빨래를 모두 해치웠고 오늘은 침대시트와 이불을 건조기에 돌렸다. 그 사이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에어컨을 모두 잠재우고 창문도 활짝 열었다. 건조기가 돌아가는 열기로 집안이 조금 더 후끈해졌지만 더운 기운으로 집안이 말라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뭉근하게 솟는 땀을 닦아내며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그곳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감싼 채 꺼내든 것이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라는 책이었다.
제목에 이끌려 사뒀다가 읽지 못했었다. 덥석 집어 들어 구입하던 순간과 달리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자의 뒷모습과 책 표지의 반을 덮고 있는 청록색의 어두운 기운이 읽지 않아도 읽은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내가 본 건 여자의 뒷모습뿐이지만 마치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한 기분. 여자의 쓸쓸함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 책이 생각난 것이다. 온통 바싹 말리고픈 여름날에 미처 마르지 못하고 침잠하는 무거운 감정들을 합리화하기에 이 책이 제격일 것 같았다.
번역된 글이라 문맥이 어색한 면도 있었지만 자기만의 공간으로 스며들어 하염없이 넋을 놓고 있고픈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내가 고요한 적막 가운데 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픈 마음으로 19호실을 그리는 것처럼. 나는 지금 고독이 충만해 지기를 기다리며 나만의 방에 머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