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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윤 Dec 18. 2021

내가 네가 된다면 분명히 행복할지도, 몰라

연극, 태양, 녹스와 큐리오.

  오랜만에 만난 절친한 친구가 '요즘 괴롭다.'라고 했다. 자꾸 자신과 남을 평가하고 그렇게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며, 이런 짓이 결코 좋지 않은 것임을,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분명 커다란 전체의 아주 작은 조각의 부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리를 끊어내지도 못하는 자신이 싫고 한심해서 짜증이 나고 괴롭고 무기력하다고. 이런 자신이 싫다고 했다.


  응, 나도. 많이 방황했다. 그것은 외모가 되기도, 내면이 되기도 했으며, 재력이 되기도, 직업이 되기도 했다. 어떠한 신념이나 사상이 되기도, 아주 작고 하찮을 어떤 행동이나 습관, 누군가의 버킷리스트가 되기도 했다. 내 주변에 있길 바랐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곳으로만 몰리는 것처럼 보였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곳은 분명히 더 행복해 보였으며, 더 낫고 바람직한 것으로 보였다. 분명히 내가 가지고 있고 쥐고 있는, 허나 당시 나의 것인지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은 그런, 나의 것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마치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숴!'라는 어느 배우의 대사처럼 나도 저렇게 되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손에 쥘 수 있지 않을까. 가질 수 있는,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 채, 아니, 애초에 무엇을 그렇게 가지려고 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불빛을 본 적도 없으면서 불빛에 달려드는 '눈먼' 나방이었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따라 했고, 무작정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를 괴롭혔다.

  그곳은 완벽해 보였고 나는 모자랐으며, 그곳은 빛나 보였고 나는 칙칙했으며, 그곳은 화려해 보였고 나는 초라했다. 나를 뒤돌아보고 돌보기도 하며 나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그곳만 봤고 그곳의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그곳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사실은 결핍이었다. 특정한 부분에 대한 결핍이 아닌 나 자체에 대한 이해의 모자람. 두껍게 가면만 쌓아 올릴 줄만 알던 나는 나의 민낯을, 나체를 볼 줄 몰랐다. 그저 나를 향한 단 한마디의 긍정이면 될 것을, 단 한 번의 눈 맞춤이면 될 것을, 그렇게 단 한 번의 끄덕임이면 될 것을 오랜 시간 몰랐다. 아니, 외면하고 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려움이었고, 낯선 것에 대한 불편함과 어색함이었고, 본질은 무방비로 반복 노출된 사회 학습과 매체 미디어에 대한 복종의 결과였다. 눈을 마주하고 끄덕이며 털고 일어나는 것보다 모르는 척 무시한 채, 어떻게든 겹겹이 덮어 숨기고만 싶어서 남에게 자신의 초점과 탓을 돌리고, 심지어 남의 가면까지 탐내고 몰두했다. 그것이 더 쉬웠다. 소독제로 치료를 시작하는 것 대신 술이나 환각제를 먹고 고통을 잊은 채 잠에 취하는 것과 같이. 효과는 강력했고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처럼, 상상하는 그것들이 손이 쥐어질 것처럼 망상에 빠지곤 했다. 아니 진짜 다 나아질 것 같은데. 다 해결될 거 같은데. 결핍을 마주하는 두려움이 클수록, 상상 속 소독제의 쓰라린 고통에 지레 겁을 많이 먹을수록 그 망상은 더욱 달콤하다. 그저 숨을 쉬고 싶었을 뿐인데 도리어 계속 가라앉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알 하나 보이지 않는, 짙은 푸른색은 어느새 새까만 검은색이 되어 나를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두 발에는 무거운 추가 달려있는 것처럼, 족쇄로 묶인 것처럼 불안과 미움이 달려있어서 더욱 가라앉게 했다. 그렇게 계속 내려앉는 몸을 스스로 놓고 있었다.


  순류를 찾는 역류는 작은 파동이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 손끝을, 발끝을, 온갖 나의 살갗을 감싸서 나를 삼켜내는 이 검은색에 얄팍한 파동으로 물결을 만들어냈는 것. 물 틈을 통과해서 내 동공에 닿는 저 빛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은 망상을 걷어내고 그 빛을 향해 거품을 만들어내는 남의 파동을 바라만 보는 미련함을 끊어내고, 당장 나에게 잡히는 물결을 타고 헤엄쳤다. 작은 파동, 작은 물결, 작은 거품, 그렇게 커다란 나의 움직임은 검은색의 역류를 만들어냈다. 방황 속에 길이 보였다. 그 길에 오롯한 내가 보였다.

 

  극의 한 대사가 이 글을 끌었다. 인간의 모든 결함을 월등히 초월한 녹스 '후지타'를 향해 기존 인간인 '데츠이코'는 그 초월성에 대한 맹목적인 선망과 추앙을 하고 그들의 환상만을 본다. 후지타는 그들에게도 초월의 대가로 태양을 마주 보지 못하는 절망이, 효율과 이성의 지배에 질식당한 감정의 상실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자신들은 가질 수 없는, 그래서 더 귀하게 빛나는 큐리오들의 태양과 감성과 공동체를 말한다.

  그러나 데츠이코는 그것은 거짓이라며,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라며 귀를 막고 당장 자신의 결함과 절망만을 품어 자신을 볼품없는 존재라며 부정한다. 데츠이코는 결국 이 모든 슬픔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자신이 그 위대한 '녹스'가 되는 것뿐임을 울부짖는다. 그런 그를 향해 후지타는 차갑게 절규한다.

  "이런 네가 녹스가 된다고 뭐가 바뀔 거 같아?"


  데츠이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완전 개인적인 다짐으로 매주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이번은 하루정도 글이 늦었어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백신을 맞았는데 아유 세상에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아니 참나 진짜 잠깐 누웠다 일어났는데, 누가 내 시간 가져갔어.

  이번에 드디어 취향 저격했던 연극, '태양'을 가져왔어요. 이 극을 본지는 꽤 됐어요. 연극의 큰 뼈는 새로운 인류와 시대가 오면서 생긴 차별과 편가름, 그 차별과 편견의 틀을 깨고 진정한 관계를 만든 두 친구의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 속에 뭐 차별과 편견, 한계와 무의지, 우월과 열등 등 생각할만한 여러 키워드가 담겨 나름 재밌게 봤던, 초반엔 조금 낯설고 지루하다가 갈수록 몰입이 되어서 결국 꿀잼으로 봤던 연극입니다. 이 연극의 많은 장면과 대사 중에서,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딱 한 대사가 진하게 마음에 계속 남는 거예요. 바로 저 대사. 저 대사를 한 '후지타'도, 그 대사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데츠이코'도, 그 상황도 모두 이해가 되었고 공감이 되어서, 살짝 초원하기도 하고 아련도 했달까요. 마치 예전에 썼던 나의 일기장을 본 듯한 그런 여운처럼요.

  '비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죠. 그 비교를 가지고 '나를 괴롭히는 것'이 문제인 거죠. 극심하게 살을 빼는 것을 반복해서 몸에 이상까지 오기도 했고, 남을 한없이 부러워만 하면서 내가 나를 어찌나 못난이 취급을 했던지요. 그렇다고 이것들이 후회하거나 미운 기억은 결코 아니에요. 오히려 저 기억들이 있어서 현재 더 나은 길을 보고 걸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비교 말고 영감을 얻어요. 더 나은 나를 위해서 말이죠.

  이건 제 신념이나 마인드이기도 한데요. '바꿀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바꾸되,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냥 안아줘라. 딸랑 나 하나라도 완전 충분하니까 누가 안아줄까 생각하지만 말고 스스로 안아주자. 이렇게나 까다로운 내가 안아준 것이라면 충분히 훌륭한 것일 테니까.' 여기에 더해서 '넌 너고 난 나다.'라는 토핑까지 올려주면 금상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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