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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 Aug 31. 2022

용서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두 교황>

할아버지 교황님들의 변화에 관한 대화



베네딕트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실화를 다룬 영화 '두 교황'이 연극으로, 그것도 굵직한 노장 배우(캐릭터 상 당연한 이야기겠지만)가 무대에 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조건 한 번은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배우는 많지만 나이가 든 배우가 설 수 있는 무대는 흔치 않다. 그런 귀한 무대라면 당연히 가야지. 사견으로 배우는 나이가 들수록 반짝거림과 딕션을 잃게 되지만 그걸 이길 연기의 치밀함과 중후함을 얻는 것 같다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고 가톨릭 신자가 아닌 터라 실제 사건이 '그사세'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이 논하는 대화는 종교의 해묵은 딜레마를 건드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들은 이제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나요?


기독교와 가톨릭은 유럽의 역사와 함께하는 만큼 오랜 기간 동안 지니고 있었던 신념이 있어왔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성경을 근거로 하여 우리 편과 반대편(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난)이 명확히 존재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는 이들을 배척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이들을 '어긋난 자들도 모두 주님의 자녀이니라' 하면서 받아들일 것인가.

양쪽 모두 자신들의 근거를 들어 주장을 내세우는 시간 속에서, 사회에서는 이들을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자기들 발 아래로 보는 이기적인 집단'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원수를 사랑하라', '낮은 곳으로 향하신 예수님'을 외치던 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종교란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을 나누는 기준(or 계급)이 되어버렸음에도, 누군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중요시 하면서도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할수 없다는게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들이 외치는 용서란, 누구를 위한 용서일까?

누군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을 때,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걸까? 아니면 상처받은 피해자를 위한 것일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가해자가 잘못에서 해방되기 위한 말이어야 하나, 아니면 피해자가 자신의 아픔을 추스르고 가해자의 사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 걸까. 영화 밀양이 생각나기도 한다

법에도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기준이 있는데, 가해자의 '무죄'는 주장하면서 왜 피해자의 '피해'에는 주목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오랜 시간 가해자 즉, 힘 있는 자의 편에 서 이 시선이 당연히 맞는 것이라 생각해 왔는지 모르겠다.



인정은 타협일까, 아니면 당연한 순리일까

변하는 것이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베네딕트(전 교황)의 말처럼, 종교는 사회 구성원 중 가장 변화가 느린 단체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수장 집단이 60~70대인 집단에서 변화가 가능한지 의심스럽기도 하다(마치 정치인들 같달까)


타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고집과 아집을 구분하는 것. 

강한자 앞에서 목소리 높이고 약한 존재 앞에서 몸을 낮춰 같은 높이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현대의 사회가 바라는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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