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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Jan 27. 202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

- 잃어버린 인간상을 찾아서

감독 : 웨스 앤더슨

출연 : 랄프 파인즈, 토니 레볼로리, 시얼샤 로넌, 윌렘 대포, 애드리언 브로디, 틸다 스윈튼, 에드워드 노튼, 주드 로, F. 머레이 아브라함, 마티유 아말릭, 제프 골드브럼, 빌 머레이, 오웬 윌슨


BBC 선정 21세기 영화 21위에 랭크된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았다. 웨스 앤더슨 감독 작품 중에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꿀잼이 보장된 영화이다. BBC 리스트 중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았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 웨스 앤더슨이란 이름도, 영화의 내용이나 스타일도 아무것도 모른 채, 모르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선택해서 본 영화이다. 친한 친구와 함께 봤는데 둘 다 엄청 재밌게 봐서 나와서 영화 이야기를 한참 했었다.  그때는 영화의 스타일이 너무 새로워서 그것만 눈에 들어왔었는데 웨스 앤더슨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너무 촘촘히 엮어서 쉽게는 보이지 않는 전체적인 내러티브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래서 더 반하게 되어서, 이 영화도 다시 보면 어떻게 다르게 보일까, 조금은 설레하며 다시 보았다. 

일단 영화가 정말 재미있다. 이렇게 재미있게 만들기 정말 쉽지 않다. 어떻게 한 장면도 불필요한 장면이 없고, 컷 하나하나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지, 진짜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가장 최근 작품인 <애스터로이트 시티>의 네이버 제공 포토에도 감독님 사진이 두어 장 있는데, 패션 센스 보고 깜놀. 그런데 이 영화 네이버 포토를 보니 감독님 훨씬 젊으시네. 너무 멋지셔서 사진 얼른 저장.)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이다. '특수한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특수한 일'들을 통해 보편적인 것들을 끌어낸다. 그리고 아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타 영화와 비교해 볼 때) 그럼에도 영화 속 스토리가 스토리 되게 하는 중심이 되는 인물이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 인물이 아주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점에서(그의 다른 작품들은 그렇지 않은 편) 영화가 보다 쉽게 느껴지고, 그렇기에 대중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또 꽤 여러 작품에서 동일한 시간 구조가 사용되는데, 현재 시점에서 출발해서 영화의 중심이 되는 과거 시점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구조가 그것이다. 이 영화도 같은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데 과거가 다시 더 이전의 과거로 꼬리를 무는 형식을 취한다는 특이점이 있다. 

영화의 끝에 다다르면 왜 감독이 이런 구조를 사용했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무슈 구스타브'(랄프 파인즈)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현재'라는 시간대에서는 보기 힘든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과거, 그 과거의 과거라는 멀리 있는 시간대가 필요한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메인 지배인이자 호텔리어의 모범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슈 구스타브는 불안한 시대에 떠밀려 이곳에 오게 된 어린 로비 보이(제로-토니 레볼로리)와 함께 하나의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거부 마담 D(틸다 스윈튼)의 정인이기도 했던 무슈 구스타브. 그의 곁을 떠나기 싫다는 마담 D를 설득해 집에 돌려보냈지만 얼마 후에 그녀의 부고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유산 상속에 대한 법적 마무리를 위해 그는 그녀의 집에 가게 되는데(마담 D가 무슈 구스타브의 몫을 남겨놓음) 악독한 마담 D의 아들 드미트리(애드리언 브로디)와 그의 개인 청부업자 조플링(윌렘 대포)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구스타브에게 어마어마한 가치의 그림을 남긴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를 추적하고 구스타브는 그림을 몰래 가져다 숨겨 놓고 지킨다는, 그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추적의 과정이 이 영화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차지한다. 

왜 이 일에 제로가 끼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 일은 구스타브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로는 구스타브가 맡긴 일을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제로의 연인 아가사(시얼샤 로넌)도 이 일에 가담하게 된다. 구스타브-제로-아가사는 진정한 의미의 한 팀이 된다.



드미트리가 원하는 것은 '그림' 하나가 아니다. '무슈 구스타브의 죽음'(그와 한 팀인 셋 모두)도 역시 원하는 것이다. 조플링이 얼마나 무서운지, 진짜 불사조 같은 강인함으로 끝까지 구스타브를 쫓는다. 필연적으로 아가사와 제로 역시 목숨을 걸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한 팀이 된 이상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다. 


해결된 건가 싶으면 또다시 눈을 부릅뜨고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조플링. 

상황의 위험도가 높기 때문에 한 팀이 된 구스타브-제로-아가사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헌신도도 비례해서 올라간다. 이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서가 아니라, 함께 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 결심을 지키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여차저차해서 많은 위기들을 넘기고, 마담 D가 자신의 아들에게 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따로 남긴 유언장이 구스타브에게 남긴 그림 뒤에 숨어 있었고, 그것이 구스타브 일행에게 진짜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마담 D의 전재산도 구스타브에게 전해졌다)

구스타브-제로-아가사를 뒤쫓는 사람이 드미트리와 조플링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던 '시대'라는 것이 명확한 이유도 없이 서로를 적으로, 위험인물로 간주하며 명확한 신분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이다. 취업허가증이라는 것을 내보이지만 본국민이 아닌 제로는 검은 군복을 입고 커다란 총을 멘 군인들 앞에서 사면초가에 빠지게 된다. 

그때, 바로 그때. 무슈 구스타브는 '오직 제로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 앞 일이고 뭐고, 일단은 내 친구 제로를 괴롭히는 이 못된 놈부터 처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무슈 구스타브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노인이 되는 것'만큼은 이루지 못한 사람이 된다. 검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총에 맞은 것이다. 생전에 제로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했던 무슈 구스타브, 그래서 그의 재산은 고스란히 제로의 것이 된다. 



도살장처럼 변해버린 잔혹한 세상에도 한줄기 희망은 있지.
바로 그가 그 희망이었네.



할아버지가 된 제로는 이 영화의 화자인 젊은 작가(주드 로)에게 젊은 시절 만난 인생의 친구 '무슈 구스타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작가는 자신에게 구스타브 이야기를 들려준 무스타파(제로)의 나이가 된 노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 노작가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글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인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무슈 구스타브'가 대단히 비범한 사람인 것처럼 그리지 않는다. (감독님 영화에는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일은 완벽하게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은 좀 가벼워 보인다. 자신의 진짜 속내는 잘 드러내지 않아 그가 보여주는 행동이 진짜일까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는 백작부인 마담 D가 모든 것을 남기고 싶을 만큼의 사랑을 주었다. 신분증의 유무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지 않았다. 자신을 아껴준 사람들을 그 역시 진심으로 아꼈다. 생명을 내어줄 만큼. 


왜 무슈 구스타브라는 실존 인물을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걸까, 그것도 두 세대가 지나서야 만나게 된 걸까. 그것은 '잔혹한 세상 속 한줄기 희망'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소설 속 캐릭터로나 보는 것이다. '옛날이야기'에나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그런 인물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그런 사람을 그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한줄기 희망'이 되어보자고 부담스럽지 않게, 두 발자국 물러서서,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한 포장지에 싸서 쓰윽하고 우리에게 내미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차가워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따뜻하다. 감정적이진 않지만 감정이 충분히 들어가 있다. 그것도 대단한 스타일로 구현해 낸다. (자꾸 감독님 칭송만..) 스타일이 너무 대단해서 영화의 주제적 측면이 잘 드러나지 않아, 이해받지 못해 영화의 퀄리티에 비해 인정을 못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는 웨스 앤더슨을 추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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