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르슬라 Jul 12. 2024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2015)

- 미쳐버린 세상에서 승자가 되는 법

감독 : 조지 밀러

출연 : 톰 하디, 샤를리즈 테론, 니콜라스 홀트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19위에 랭크된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를 보았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몇 년 전이긴 한데, 최근 재개봉해서 극장에서 다시 관람하게 되었다. 처음 봤을 때 충격적 일정도로 재미있어서 나중에 한 번 더 보았고, 최근 개봉한 <퓨리오사>를 보고 나서 다시 보고, 그리고 극장 관람까지 총 4번이나 본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아하는 영화이다. 스토리에서 어떤 통찰이나 교훈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감독이 구축한 방대한 세계관 안에서 활개 치는 캐릭터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퓨리오사>를 본 후, 이동진 평론가와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조지 밀러 감독님) 예상했던 것보다는 말씀을 좀 어눌하고 두서없게 하시더라는. 다른 색깔의 작품들도 찍어봤지만, 찍는 게 물리적으로 힘들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자꾸 이 매드맥스의 세계관에 끌린다고 말씀하셨다. 


지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가 아니고, 핵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 몇몇 빌런들이 자기만의 영역을 차지해서 각자의 방법으로 그 세계에 군림하며 메시아 노릇을 하고 있다.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살고 있는 곳은 임모탄 조가 지배하고 있는 시타델. 그는 지하수를 손에 쥐고 사람들에게 때때로 물을 주며 자신만이 너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세뇌시켜 이용한다. 물이 있기 때문에 식물(먹을거리)도 기를 수 있고, 살아가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 다만 임모탄을 제외한 인간들은 그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없을 뿐.



여기에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맥스(톰 하디)가 붙잡혀 오고, 탈출하다 실패한 후 병든 워보이의 피주머니(수혈) 노릇을 하게 된다. 한편 늘 하던 대로 무기창고와 가스타운에 들러 물물교환을 하려고 출발한 사령관 퓨리오사가 사실은 임모탄의 여자들 (임모탄이 자식을 낳기 위해 강제로 취한 여자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자 임모탄은 워보이들을 총동원해 직접 여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시타델을 떠나고 임모탄의 관심을 받고 싶었던 눅스(니콜라스 홀트)는 자신의 피주머니인 맥스를 대동하고 분노의 도로에 합류한다. 


퓨리오사가 정처 없이 시타델을 떠난 것은 아니고 자신의 고향 녹색의 땅으로 가려고 한 것이었다. (이번에 나온 퓨리오사에서 이 부분이 자세하게 그려진다.) 가스타운과는 이미 이야기를 해놓았는데 임모탄이 예상보다 빨리 뒤쫓아온 바람에 그 계약도 힘을 잃는다. 그렇다면 막무가내로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

원치 않는 임신, 임모탄의 노리개로 사는 것이 너무 싫기에 퓨리오사를 따라왔지만 막상 생사가 오가는 싸움에 한복판에 있자니 그 여인들은 갈등하게 된다. 다시 돌아갈까?

그리고 어차피 암으로 죽을 목숨, 임모탄을 위해 희생하고 천국에 가고 싶은 눅스가 사생결단 수준으로 퓨리오사 일행에 따라붙는다. 



쫓고 쫓기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 미친 남자 매드 맥스가 천군만마의 역할을 하게 되고, 퓨리오사도 그를 믿게 된다. 여러 고비들을 넘기며, 황폐해진 땅들을 지나다가 이들은 퓨리오사의 고향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이제 녹색의 땅이 가까이 왔구나 안심하는 잠깐의 기쁨 후에 그들이 지나온 황폐한 땅이 그들이 찾던 녹색의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퓨리오사는 절규한다. 퓨리오사는 남은 연료를 오토바이에 나눠 실으면 최대한 멀리 갈 수 있으니 그렇게 다시 우리의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고 하고, 맥스에게 동행하겠느냐고 묻는다. 맥스는 덤덤하게 그러지 않겠노라고 말하는데, 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봤자, 뭐가 나오겠어. 차라리 다시 돌아가는 게 어때."


나는 진짜 여기서 뒤로 넘어갔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정말로 단전에서 올라오는 카타르시스.

그리고 또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만 하지만, 한 번 해봤는데 두 번도 할 수 있다. 도망칠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다고 해서 현실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악한은 사력을 다해 공격을 하고 그 과정에서  퓨리오사가 큰 부상을 당한다. 며칠을 함께 하며 퓨리오사를 신뢰하게 된, 그리고 전우애가 생겨버린 맥스는 그녀가 죽어가도록 그냥 두지 않는다. 기꺼이 자기 피를 나누어주며 그녀를 살려낸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시타델을 정복하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운다. 눅스의 희생이 있어 그들은 임모탄 조를 죽이고 결국 시타델에 도착한다. 임모탄이란 지배자가 사라진 시타델에서 '물'은 이제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사람들의 떠나갈 것 같은 환호 속에 퓨리오사가 입성하고, 여기까지 동행하며 그녀를 도왔던 맥스는 또 혼자가 되어 자신의 길을 떠난다. 




아마, 지금도 이 세상은 '미친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또 어쩌면 오래지 않아 점점 더 이 세상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생존'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또는 '승리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은 미쳐버린 세상에서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퓨리오사는 어떻게 시타델을 차지하고, 승리할 수 있었는가.

 

프리퀄 <퓨리오사>를 보면 납치되어 이곳에서 살게 됐던 때부터 퓨리오사는 자신의 고향인 '녹색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반드시, 때가 되면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리라."


이 결심, 이 목표가 퓨리오사의 삶의 가장 큰 동력이 되고, 크고 작은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이십여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를 동안 그녀가 쌓아온 모든 경험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원료가 되고, 이정표가 된다. 때가 되었을 때, 즉 준비가 되었을 때 감행한다. 준비가 된 때라는 것이 위험요소가 제거된 때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예상 가능한 모든 상황들을 자신이 통제할 자신이 생겼을 때, 그때가 바로 움직일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큰 위협이 나를 덮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삶이란 본디 그러하다.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버거운 장애물들을 몇 번이나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그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용기나 정신력이라기보다는 '조력자의 등장'이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수많은 조력자들의 애정 어린 간섭이 있었다. 이것이 조력이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수많은 조력들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수놓았다는 것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조력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상실했을 때에 한마디 말로써 다시금 방향을 설정할 수 있도록, 수십 년 붙들어왔던 목표가 아닐지라도 의미 있는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는다. 또 이 조력자는 자신이 제안한 이 목표를 당사자가 성취할 때까지 실제로 옆에서 함께하며 힘을 보태 돕는다. 하지만 그녀가 도달해야 할 곳에 도달했을 때, 어떤 미적거림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난다. 이것은 그의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목표, 굳은 결심, 회피하지 않고 부딪히며, 넘어져가며 얻어낸 삶의 경험들, 그리고 그것들의 융합으로 갖게 된 자신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이런 것들이 있다면 적어도 빼앗기거나 휘둘리지는 않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바라던 궁극의 지점까지 가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반드시 마음을 함께 하는 동지가 있어야 하고, 대가 없이 나를 돕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조력자가 과연 나타날 것인가.

맥스가 퓨리오사의 조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퓨리오사가 그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끝까지 의심하고 그와 싸웠다면 결코 그녀의 조력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할 거대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맥스의 언행과, 눈빛을 보고 알아채는 것이다. 이 사람은 믿어볼 만하다. 


어쩌면 나에게 조력자가 없는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도움 받기를 거절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몰라봐주었기 때문인지도, 그들에게 나와 함께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조금만 더 마음을 연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나의 조력자가 될 수도 있다. 


살아보니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와 관계가 없을지라도 누군가를 돕는 일에서 행복과 의미를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지 거부하고 싶지 않다. 

퓨리오사 그녀가 실은 임모탄의 여자들의 조력자가 아니었던가, 그녀들을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구원자가 아니었던가. 자신의 목표를 다른 누군가를 함께 살릴 방법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러하기에 자신을 도울 자가 누구인지 직감할 수 있었을 테다. 그녀의 목표는 녹색의 땅에서 아끼는 이들과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과정이나 방법이야 얼마든지 열려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미친 세상에서 승자가 되는 법. 그것은 내가 누군가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고, 또 누군가를 나의 조력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