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법적인 불평등이 빚어낸 개인의 폭력성
감독 : 모함마드 라술로프
출연 : 미삭 자레, 소헤일라 고레스타니, 마흐사 로사타미, 세타레 말레
스포 많아요!!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신작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봤다. 키아로스타미, 파르하디 감독님들의 영화는 거의 다 볼 정도로 좋아하고,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택시>도 굉장히 인상 깊게 봤다. 개인적으로 이란 영화를 좋아한다는 이야기..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작품은 국내 첫 개봉이라고 한다. 이 영화가 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뉴스에 이란 당국은 제작진, 출연진을 심문하고 출국을 금지했으며 구속과 이란을 떠나야 하는 것 중 선택해야 했던 라술로프 감독은 결국 망명을 선택했다고 한다.(2017년에 이미 여권을 빼앗겨 정상적인 출국이 불가능했다고 함) 그리고 두 주연배우(미삭 자레, 소헤일라 고레스타니)는 이란을 떠날 수 없어 영화제에 참여하지 못해서 감독님이 칸에서 두 사람 사진을 들고 찍은 사진도 울림이 있었다.
영화의 초중반까지는 예술적 접근은 거의 보이지 않고, 노골적으로 사회, 정치적인 면을 보여서 6,7점을 준 평론가들의 평점을 떠올리며 '그러한가' 했었는데, 영화가 다루는 사건이 가정으로 소급되며 국면이 전환되는데, 거기서부터 이 영화의 진가가 드러난다.
이슬람 문화가 가지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는 여기서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것이다. 이슬람 교조주의에 빠진 자들과 시대의 변화라는 흐름을 타고 그들과 맞서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 영화의 골격을 이룬다.
대학생 딸 하나, 16세 딸 하나를 둔 가장 이만(미삭 자레)는 혁명재판소 판사로 가기 전 단계인 '수사판사'로 승진하면서 희망을 품지만 테헤란은 지금 히잡 시위로 난장판인 상태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사람들을 붙잡아와서 판결을 내리라고 하는 상황. 가정 주부인 나즈메(소헤일라 고레스타니)는 자신의 딸들도 시위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 불안하다. 더군다나 큰 딸 레즈반(마흐사 로사타미)의 가장 친한 친한 친구 사다프가 시위에 직접 참여할 정도로 열성적이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두 딸을 차로 학교에 데려다주는 길 곳곳에 시위대와, 시위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학교에서 나오다가 경찰의 산탄총에 얼굴을 맞은 사다프를 몰래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레즈반. 동생 사나(세타레 말레)가 돕는다. 엄마 나즈메는 집에 있는 비상약품으로 사다프의 얼굴을 소독하고 닦아내며 얼굴에 박힌 구슬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아이들이 연루될까 봐, 이제 승진한 남편의 앞길을 막을까 봐 나즈메는 아이들에게 냉정하게 말하지만(친구를 집에 보내고 그 아이와 가까이하지 마라) 연락이 되지 않고 행방이 묘연하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레즈반의 말에 친구(남편이 검사)에게 부탁을 한다.
이만은 승진하면서 총 한 자루를 받는다. 이유인즉슨 스스로를 지키라는 것. 인터넷, sns가 발달한 요즘은 선고를 내린 판사와 판사 가족들의 신상을 온라인상에 다 까발리기도 하니까. 그런데 며칠 후 총이 사라진다. 아내도, 두 딸들도 자기는 아니라고. 온 집을 다 뒤집어엎어도 사라진 총은 나오지 않는다. 초조하게 하루하루 지내는 이만. 동료 판사는 방법이 있다며 나즈메가 사다프의 행방을 알려달라 부탁했던 친구의 남편. 즉 남편 이만의 친구인 검사에게 가족들을 심문하라고 제안한다.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가족을 모두 태우고 그의 집으로 가는 이만. 그는 말을 흐리며 아내 나즈메도 차에서 내리라며 세 사람을 모두 검사 친구 앞에 세운다. 그냥 이야기만 나눌 것이라는 이만의 말과는 달리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 눈이 가린 채 세 사람은 심문을 받는다. 비밀로 부탁했던 사다프에 대한 일도 이미 검사(친구의 남편)는 다 알고 있다.
이제 이만은 식구들을 겁박하기 시작한다. 엄마 나즈메가 더 앞장서서 두 딸을 야단치며 숨긴 총 얼른 내놓으라고 한다. 그러다가 이만의 신상이 sns에 올라와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가족은 테헤란을 떠나 이만이 살던 시골집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이만은 떠나기 전 동료에게 총하나를 다시 받아서 가지고 있다.
시골집에서 지내면서 먹을 식재료들을 사는 데 가게 안에 있는 두 남녀의 행동이 수상하다. 이만을 흘끗 쳐다보면서 사진을 찍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서둘러 차에 탄 이만은 두 남녀가 탄 차를 따라가기 시작하더니 차를 옆에 바짝 붙이고 부딪히면서 위협한다. 차 안에 아내 나즈메, 두 딸 레즈반과 사나가 타고 있고, 겁에 질려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을 몰아세워 차를 세우게 한다.
이만의 예상대로 그들은 이만의 뒤를 쫓으며 그를 몰래 카메라에 담아 SNS에 올리려던 사람들이다. 갓 스무 살인 청년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야 했던 고뇌를 아내 나즈메에게 털어놓은 바 있지만, 국가는 이미 정해진 형량을 물건 찍어내듯 찍어내라고 강요한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 이만은 가책을 느끼긴 했지만 자신의 안위를 양심과 바꾸지는 못했던 것이고. 이 사실을 몰랐던 딸들은 아빠에게 더 실망하게 되고, 아빠에게 총이 있는 걸 보고, 찾은 거냐고 아내와 큰 딸은 묻지만 그때 사나는 레즈반에게만 몰래 훔쳐뒀던 총을 꺼내 보인다.
시골집에서 아빠 이만은 음식을 준비해 가족들을 먹이는 등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 이 모습에 아내도 막내딸 사나도 사랑을 느낀다. 사나는 평화로웠던 한 때, 가족이 여행 갔을 때 아빠 이만이 노래를 불러주었던 캠코더 영상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만은 돌변해 '거짓말을 참을 수 없다'며 눈을 부라린다. 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즈메는 자신이 훔쳤다고 거짓말을 하고, 범인을 심문하듯 그녀를 카메라 앞에 앉혀놓고 질문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나즈메는 이만이 생각한 범인이 아니다. 이제 레즈반이 나선다. 사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때까지 사나는 시치미를 떼고 아빠가 하는 행동을 공포 서린 눈으로 볼뿐이다. 나즈메와 레즈반을 각각 다른 공간에 감금한 이만. 그 사이 사나는 도망친다. 그리고 아빠와 막내딸의 추격전이 시작된다.
사나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너무 똑똑하게 나와서 현실성이 좀 떨어지긴 한다) 숨어 들어간 창고에 있는 고물들을 이용해 스피커를 만들고, 소리를 이용해 이만을 유인한 뒤 엄마와 언니를 구출한다. 세 모녀는 남편이며 아버지인 이만을 피해 도망가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흩어진다. 쫓고 쫓기는 추격 끝에 사나와 마주 서게 된 이만.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딸에 대한 배신감은 둘째 치고, 어린 여자애가 감히? (총을 쏘는 방법도 모를 거라고 믿고 있다. 이렇게 아빠와 대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딸을 무시한 것) 이런 뉘앙스가 더 강하다. 어디 한 번 쏴보라고 딸을 겁박하며 다가오는 이만. 사나는 아빠가 서 있는 땅을 향해 총을 쏜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지반이 무너지며 (평평한 땅이 아니라 사막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굴들이 있는 지형) 이만은 아래로 떨어진다.
한 때 구성원 모두가 진리라 믿었던 종교 교리도 시간이 흘러 시대가 바뀌니 의심의 대상이 된다. 시민 사회가 성숙하면서 올바른 것에 대한 분별이 생기고, 그것과 대치되는 종교 교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그저 특정 대상을 옥죄는 사슬이며,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짓일 뿐이다.
불평등이란 누군가는 혜택을 받는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합법적으로 보장받았던 불평등이 체화된 개인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그들이 다시 사회 구조에 순응하면서 동시에 구조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각 가정에 혜택을 받는 자와, 혜택에서 제외된 자가 공존하는 기이한 구조. 수사판사로서 사회에서 '폭력'으로 간주된 것을 법에 의해 응징하는 '폭력'을 자행하고, 가정에 돌아와서는 체화된 폭력성을 죄책감 없이 가족 구성원에게 휘두른다.
나즈메가 같은 여성임에도 남편의 편에 서서 두 딸들에게 야박하게 굴었던 이유는 사실 남편의 폭력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임이 영화 후반에 드러난다. '너희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가장 어린 사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평등한 구조에서 살아간 연수가 가장 짧아서 가장 거부감을 느끼고, 저항하는 것에 크게 겁먹지 않는다. 아이이기 때문에 반항적이고 저돌적이다. 엄마가 아빠한테 져주는 것도 알고 있다. 아빠가 옳아서가 아니라, 지는 것을 엄마가 선택하는 것임을.
그래서 가장 어린아이는 이 가족의 구원자가 되기로 한다. 중간 과정에서 엄마와 언니가 억울한 누명을 써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끝까지 믿는다. 아빠라도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을 시인해야 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아빠가 가져다주는 안락함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선택한다. 자신이 속한 국가의 구조적 결함은 너무가 거대해서 죽음을 불사해야 하고,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이라고 믿는다.
조금은 짜증스럽게 느껴졌던 사나의 행동이 영화 종반부에서는 완전히 이해가 된다. 세계는 이미 변했는데 자신이 속한 좁은 세계만 변하지 않아 고통스럽지만, 변한 세상에 가장 빠르게 적응한 것도 사나다. 총을 쏘는 법을 유튜브를 통해 스스로 익히고, 이 세상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이들에 대응하는 방법도 가장 잘 알고 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제국도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나는 개인 VS 사회가 선과 악으로 맞서는 이야기를 싫어한다.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아도 사회란 결국 개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문제가 없는데 사회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제가 만연한 사회의 일원은 그 문제가 어느 정도는 체화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불평등은 종교라는 이름 하에 합법적으로, 오랜 기간 평화를 가장해 자행된 것이기에 문제의식을 갖기가 더 어렵다. 이것이 문제라고 말하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었던 신념이 흔들리게 되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면 변해가는 세계 속에 고립될 수밖에 없고, 사랑하는 가족이 핍박받는 것에도 침묵해야 한다.
영화는 이런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합법적으로 자행된 불평등이 체화된 개인이 근간이 된 사회.
시작은 핍박받는 자들의 용기가 동력이었다 해도, 혜택 받은 자들의 용기가, 혜택 받은 개인의 각성과 연합이, 사회를 변화시킬 가장 큰 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