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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카테 Sep 07. 2021

들어가며


하루는 예빈이 울었다. 같이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직원이 플라스틱 컵에 담아준 것이다. 실내에서 마시는 것이라면 일회용기 말고 머그잔이나 유리잔에 담아주어야 하는데 귀찮았던 것인지, 다회용 컵이 부족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플라스틱 규제를 지키지 않는 카페를 근래 찾아볼 수 없어 미리 유리잔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말도 없이 플라스틱 컵과 빨대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온 예빈은 참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다들 정말….”




그녀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울었다. 화를 참을 수 없는 것이겠지. 곧기로는 대나무 못지않은 예빈이 플라스틱 컵 하나 때문에 이렇게 눈물을 쏟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린 시간들이 착실히 쌓였으리라. 목 끝까지 찰랑거리는 슬픔과 분노를 쏟아내기에는 한 방울의 커피면 충분했다.




“다들 왜 이렇게 무신경할까.”




이렇게 작은 것들이 모여 인간을 포함한 많은 생명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예빈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참 마음이 아팠다. 사람으로 태어나 밥을 먹고 숨만 쉬며 살아도 고단할 때가 많다. 더욱이 남들은 개의치 않지만 자신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목에 가시가 걸린 채로 사는 일이다. 어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말을 삼키는 날들, 그리고 말할 때마다 가시에 찔리지만 용기를 내어 말해야만 하는 날들. 심지어 말하고도 불편한 혀의 끝 맛.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지만 자신의 무력함에 씁쓸해하며 거리를 걷는 낮과 밤. 




나는 예빈을 친구이자 사람으로 아껴서 이런 복잡다단한 감정을 모르고 살았으면 했다. 나조차도 못할 짓이야, 속으로 읊조리며 열패감에 괴로울 때가 많았다. 성격이 어지간히 뒤틀리지 않고서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차마 말하지 못했으나 예빈의 자조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예빈아, 사람들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무신경할 거야. 그녀는 나보다 강인하여 굳게 자신의 길을 가겠지만 어떻게 그 길을 걸을 것인지는 스스로 정해야 한다. 그리고 중심을 잡을 때까지, 많이 아프고 때로는 속수무책으로 울어야 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죽음을 지켜본 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에 예민했다.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다더니, 세상은 그렇게 도덕적인 곳이 아니었다. 제 잇속만 아는 부잣집 자식은 잘 살기만 하던데 하복을 입는 게 꿈이었던 중학생은 부질없이 세상을 떴다. 나는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세상이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다는 걸 인정하게 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념하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와서 불법 촬영 피해자의 동생이 인터넷에 올린 만화를 우연히 보았다. 피해자는 이미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피해자를 조롱하는 댓글을 보고 나는 아주 화가 났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부의 남학생이 상습적으로 불법 촬영을 한 사건이 짜하게 퍼졌다.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어 그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휴학 후 자취를 감췄다. 예상되는 피해자는 여럿이었다. 나는 아주아주 화가 났다. 이후 시위에 나가고 모금을 하고 여성 단체에 들어갔지만 나는 무력감을 병처럼 앓았다. 꼭 쥔 주먹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듯 자꾸 여성의 목소리는 소거되고 여성의 삶은 버려졌다. 내가 모두를 도울 수 없는 것인데 그때는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 마음으로는 부정했다. 순진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빈의 충혈된 눈에서 내 이십 대 초반을 반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때와 지금의 현실이 별다를 바 없다는 것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만화를 그린 동생은 자신의 언니를 앞으로도 마주하지 못하겠지만 범죄를 저질렀던 남학생은 버젓이 복학했다. 우는 친구를 앞에 두고 희망적인 위로가 목구멍의 가시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도무지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사회가, 사람이 변하는 속도는 아주 느려서 결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바뀌지는 못할 것이다. 이 현실을 당장 뒤엎을 수 없으니 나부터 예빈을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이미 그녀가 불편함을 감내하기로 결심했다면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적극성은 예빈을, 비건으로서 예빈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으나 나는 환경을 염려하는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플라스틱을 덜 쓰기 위해 텀블러를 쓰는 것 이외에도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동물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예빈은 어떤 기준으로 재료를 고르는지 궁금했다. 단지 같이 비건 음식점에 가고 비건 케이크를 사서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소극적인 배려일 뿐이었으니까. 예빈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 또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글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오래된 사진첩보다 정성 들여 쓴 편지가 나에게는 더 큰 위안이었으므로. 현실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내가 차라리 눈을 감기를 바랐던 새벽, 나는 간신히 몇 개의 구절을 붙들고 잠에 들곤 했다. 나처럼 안식을 위해 글을 찾지 않더라도 예빈과 더욱 친해지기 위해 쓴 이 글이 그녀에게 든든한 뒷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가깝기에 잘 몰랐던 예빈 자신의 대단함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기를. 늘 나의 친구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을 내가 사랑하는 소설의 한 귀퉁이로 대체한다.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 정세랑, <피프티 피플>, 창비, 2016,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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