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예빈은 늘 더부룩한 속이 고민이었다. 돌이켜 보면 ‘학생이란 신분으로,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좌식 생활을 고수했던 것은 실로 고문이었다. 철근이라도 씹어먹을 나이라 했지만, 이런 생활 패턴이라면 어지간한 건강 체질도 소화 불량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예빈은 또래와 견줄만한 소화능력이 없었다. 샤프만이 서걱거리는 야자 시간에는 배에서 나는 소리로 민망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꾸루룩, 꾸르륵. 뱃속의 부글거림이 방귀 소리같이 들리진 않을 지 서둘러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화장실이라도 잘 갔으면 좋았겠지만, 만성 소화 불량과 만성 변비는 일종의 세트 상품인지라 갑갑한 속을 풀 길이 없었다. 불편하다 생각했지만 그때는 불편함의 원인을 찾겠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누구나 몸에서 취약한 부분이 있고 자신에게는 그게 위장이나 대장이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다행히 예빈은 인고의 시간 끝에 급식과 작별했다. 대학에 입학하며 먹을 자유는 한층 견고해졌다. 그녀는 기꺼이 육고기를 끊었다. 육식을 멈추자 놀랍게도 화장실과 친해졌다. 몸은 서서히 바뀐 식습관에 길들었고, 길을 걷다 예빈은 몸이 전에 없이 가뿐하다는 것을 느꼈다. 배의 울렁거림이나 위가 빵빵하게 불어나 있다는 감각이 멎었다. 이제는 반찬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시간이 줄었다. 그녀는 단순히 잘 씹어 삼킬 수 있는 식단을 택했다. 일련의 변화는 여유롭게 찾아왔지만 예빈은 한편으로 수긍했다. 어쩌면 우리는 넘치도록 다른 동물의 살을 발라냈던 것일지도. 우리의 몸이 다른 동물의 몸을 잘 소화시키리라는 것은 오해였을 거라고. 축일에만 큰 마음먹고 소 한마리를 잡았던 날들과 우리의 현재는 꽤 가깝다. 한 세대 동안 대단한 진화를 겪지 않는 한 우리의 소화 기관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픈 배를 붙잡고 눈을 굴리는 대신 먹던 음식을 헤아려 보는 편이 좋았다는 것을 좁다란 교실에서 미처 알지 못했다. 육식이 당연한 식습관이라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기인했을까.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민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터라 예빈의 마음 또한 부쩍 튼튼해졌다. 잠들기 전 마음에 걸리는 게 없다는 것, 오늘 하루치의 폭력을 소거했다는 믿음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지난날 일상을 잡아채곤 했던 무력감이나 우울 또한 잠잠했다. 비건 커뮤니티에 입문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연결된 이후로 마음의 근육은 지칠 줄 모르고 자라났다. 제 2의 성장기였다.
처음엔 순전한 궁금증으로 비건 커뮤니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예빈의 가족이나 지인 중에서 비건은 없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이나 해외의 유명인사 외에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녀 외에 실제로 비건이 있긴 한건지, 그들은 왜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일상 생활에서 비건으로서 겪는 행복과 그에 상응하는 고충을 말할 수만 있다면. 와글거리는 말들에 되려 입을 다물 정도였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간 비건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쉽게 친구가 되었다. 교내 동아리부터, 동아리들의 연합 모임, 거리 행진까지 예빈은 착실하게 행동 반경을 넓혔다. 무엇을 먹고 입고 쓰는 지 얘기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새로운 친구들의 말투와 태도야 말로 그녀를 무장해제 시켰다. 동물에 대한 비폭력은 곧 인간에 대한 비폭력이기도 해서, 일상 생활 속의 신경을 건들이곤 했던 언행을 비건 친구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무신경한 날카로움이나 무례란 생소한 이야기였다.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태도, 있는 그대로 타인에게 눈을 맞추려는 상냥함, 장난기 섞인 혐오가 삭제된 말들. 열띠게 놀다가 핸드폰 속의 급상승 검색어라도 보는 날이면 어쩐지 동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자극적인 가십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 건지 의심하곤 했다.
가끔 비거니즘 동아리를 취재하고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항상 비건으로 살며 어렵거나 힘든 점이 무엇인지 묻고자 했다. 사람들은 기어이 다른 것을, 새로운 것을 틀리다고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비건의 삶을 펼쳐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걸까.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 ’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슬픔이 때로는 호승심이 되어 육식을 하고 일회용품을 마구 쓰며 사는 삶의 고충을 말하고도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런 질문지를 들고 오는 인터뷰어는 드물었다. 예빈은 그저 건강한 위장과 가뿐한 몸과 회복력 좋은 정신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이 삶에 기꺼이 함께하고 지지대가 되어주는 사랑스러운 친구들에 대해서도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물어주기를 바란다.
비건, 하면 좋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