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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연춘추 Dec 12. 2021

1.1 매킨더의 심장지대론과 정치지리학 비평

심장지대는 영국의 지리학자 페어그리브가 매킨더의 중추지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 넓게 펼쳐진 내륙 하천 지대와 북극해로 향하는 하천 유역을 뜻한다. 카르파티아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 술라이만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을 경계로 반월지대와 나뉘는 이 지역은 ①유럽 동부와 아시아 북부를 관통하는 거대한 스텝 지대(매킨더는 이 지역을 일컬어 대평원 지대라 이름했다)와 ②니콜라예프스크에서 노브고로드까지 이어지는 침엽수림 지대, ③건조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형성된 타클라마칸 사막, 키질쿰 사막, 카라쿰 사막, 루트 사막 등 사막지대와 ④타림강,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 볼가강 같은 내륙 하천 유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연중 최고온도와 최저온도 차이가 무려 28도를 넘을 뿐만 아니라, 겨울철이 되면 하천 결빙 현상으로 인해 안정적인 수로 운송체계 확립이 불가능하며, 반월지대와의 자연 경계선을 형성하는 거대한 산맥·고원 지대를 제외하고는 군사적 방어선을 삼을 만한 자연장애물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은 혈연관계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로 뭉친 부족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의지할 곳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족 공동체의 경제활동과 관련된 물자 확보를 위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 구성원 외 타자에 대해 무자비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잦았다. 나아가 이 지역은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해양문명 또는 바다를 통해 전해지는 문명의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었으며, 심장지대의 내해나 다를 바 없는 크림반도와 흑해 북부 연안에 위치한 그리스-비잔티움 계열 상업도시만이 이들과 해양 세계를 연결해줬다. 물론 심장지대 주민들이 반드시 이런 흑해 연안의 그리스계 상업도시들을 통해 해양문명과 직접적으로 접촉했다고 볼 수 없다. 일례로 조시모스 《역사》를 보면 보스포로스 왕국은 로마제국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 로마제국과 유목민족 사이의 중개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으나, 대신 유목민족들에게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상업용 선박을 제공하지 않았다. 비록 고트족은 보스포로스 상인들을 회유하는 데 성공해 아나톨리아와 그리스를 약탈하는 데 성공했지만, 고트족 이전에 유목 민족들이 선박을 이용해 아시아 지역을 약탈한 예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지리적 요인 때문에 심장지대 주민들은 오랫동안 해양문명과 격리되었으며, 이들에게 있어 바다는 멀리 떨어진 추상적 개념에 가까웠다.


비록 해양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지대 주민들은 내륙지대를 통합한 다음 해양문명을 위협했기에(페르시아 전쟁, 원나라의 일본 정벌과 자바 정벌 등) 앵글로-섹슨 계열의 지정학자들은 심장지대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지정학의 창설자(물론 본인은 정치 지리학자라고 스스로를 칭했지만)나 다를 바 없는 매킨더는 자신의 기념비적 연설(《역사의 지리적 중심축》, 1904년)에서 해양문명 또는 해상 무역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 정치세력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요인은 기동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만일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 철도와 같은 근대적 교통망을 이용해 해양세력에 준하는 기동성을 갖추게 된다면, 이들은 심장지대의 접근성을 이용해 반월지대로의 팽창을 시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해군을 건설함으로써 명실공한 세계제국이 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이 같은 심장지대 제국의 세계제국화를 저지하기 위해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이집트, 인도, 한국과 같은 교두보 국가와의 군사적 연대를 추진함과 동시에 이 일대에 대규모 육상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심장지대 제국이 해군 건설에 쏟을 역량을 대규모 육군 건설에 매몰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매킨더는 자신이 《지리학의 범위와 방법론(The scope and methods of geography)》에서 제시한 육상 늑대(land-wolf)와 해상 늑대(sea-wolf)의 대립구도를 체계화해 제국주의 열강을 그리스 문명의 계승자인 대륙형 국가와 로마제국의 후신인 해양형 국가로 나눈 다음, 사회 조직 능력이 떨어지는 유목민족을 대신해 러시아가 심장지대를 점령한 작금의 상황이야 말로 해양세력이 주도하는 세계질서(특히 매킨더는 국제연맹을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봤다)에 대한 구조적 도전이라고 봤다. 이 같은 매킨더식 세계질서는 《민주의 이상과 현실(Democratic ideals and reality, 1919)》에서 구체화됐는데, 이 소책자에서 그는 20세기 런던의 정치인들이 직면한 지정학적 대결구도를 대영제국으로 대표되는 해양세력과 심장지대를 최초로 조직화하는 데 성공한 러시아 제국의 대립으로 이해하고, 이 같은 지정학적 환경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이벤트를 예측하는데 집중했다. 일례로 그는 발트해와 흑해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며, 심장지대를 장악한 러시아 제국이 카르파티아 산맥과 토로스 산맥을 넘어 판노니아 평원과 아나톨리아로 진출할 경우, 구대륙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제국의 전략적 실패를 경제적 요인 때문에 해양세력과의 전면전을 먼저 시작했음을 지적하며, 만일 독일제국이 심장지대를 장악한 다음, 내륙지대의 광물자원과 식량, 노동력을 이용해 해상 진출을 시도했을 경우, 해양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가 보기에 자연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제한된 공간(도서 또는 반도)만을 정치·경제적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해양형 국가에 비해 구대륙을 최종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심장지대 국가야말로 전 세계의 자원을 독점할 수 있으며, 이 같은 대륙형 세계제국의 출현을 막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폴란드와 발칸반도에 거대한 완충지대를 만들어 이들의 세계제국화를 막고, 나아가 완충지대에 위치한 국가들이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게끔 국제연맹이 정치·군사적 개입 노선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월 혁명의 발발과 함께 러시아 제국이 적백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자, 매킨더는 자신의 지정학적 구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지금이야 말로 심장지대를 분열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으며, 캅카스 지역과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레나랜드(동시베리아 지역)를 미국에 할양하며, 볼가강 유역에 여러 소국들을 만들어 러시아가 두 번 다시 제국으로 일어날 수 없게 여러 나라로 쪼개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매킨더는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거대한 완충지대를 만들어 독일의 심장지대 진출과 소련의 해양 진출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같은 매킨더의 구상을 받아들인 영국 정부는 유럽 동부에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 등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나라들을 세워 독일과 소련 사이 완충지대로 삼았으며, 유사시 이들의 독립을 위해 군사적 개입도 가능함을 천명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영국 정부의 예상을 깨고, 빠르게 폴란드를 점령했으며, 이어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등지를 점령함으로써 재빠르게 유럽 대륙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오히려 매킨더가 그토록 경계했던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베링 해협에서 북동일 평원까지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매킨더 자신은 대영제국의 몰락을 지켜보며 우울한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심장지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처음 제기했다는 점과 대륙형 국가와 해양형 국가 간 대립이라는 지정학적 구도의 확립이라는 점에 있어 매킨더 학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무엇보다 매킨더의 정치지리학(또는 역사지리학)은 인문학이 과연 현실정치를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할 수 있느냐는 세인의 물음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인문학의 정치화, 또는 인문학의 현실정치 해석을 가능케 만들었다. 그러나 매킨더의 심장 지대 진출론을 위시한 지정학적 담론은 나치 독일의 군사적 팽창과의 연계 때문에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된다. 당시 하우스호퍼 등 독일 지정학자들은 매킨더의 학설에 큰 감명을 받고, 매킨더의 학설을 적극적으로 소개할 뿐 아니라, 이를 발전시켜 지정학적 성채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훗날 나치 독일이 폴란드, 소련으로 침공하는 주된 요인이 된다. 당연히 매킨더와 독일의 관계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영미권 언론들은 그를 “나치 조력자”라며 비판했는데, 이 같은 비판에 직면한 매킨더는 1942년 《민주의 이상과 현실》을 재인쇄하며, 서문에 자신과 나치 독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물론 매킨더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다양한 비판이 존재했다. 심장지대를 통일한 러시아 제국과 소련이 실존했을 당시, 그의 주장은 그래도 미소 냉전을 해석하는 지식체계로 인정받았으나, 심장지대를 조직했던 마지막 유럽식 제국인 소련이 해체된 직후, 매킨더의 학설은 해양 패권설의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해양의 기동성과 접근성이 심장지대에 비해 유리할 뿐만 아니라, 심장지대 제국이었던 소련 지도부가 끝내 자신들의 제국조차 지키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심장지대의 전략적 가치가 실제보다 높게 평가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이 심장지대 동부에 해당하는 독립회랑(카슈미르, 위구르, 티베트)을 점령한 사실과 중·소 분쟁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전통적 교역망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결국 미국의 해양론자들이 자신들의 이목을 다른 분쇄지대에 집중하는 동안, 중국은 심장지대 진출을 이어갔으며, 시진핑 시대에 이르러 이 거대한 내륙지대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정학적 성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중국 제국화에 대한 매킨더의 경고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적중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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