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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티너디 Nov 09. 2023

기괴했던 시대에 대한 다큐멘터리 <플라워 킬링 문>

플라워 킬링 문 후기


 인디언 박물관에서의 일이었다. 나선형으로 이어진 박물관은 벽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구조였고 중앙에는 홀이 있어 바닥이 내려다보였다. 나는 그 날도 또 다른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구경했다는 기쁨과 새로운 전시물들에 환희를 느끼며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음악 소리가 들렸다. 8년도 더 된 오래된 기억이기에 어떤 음악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리가 만들어낸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큼지막한 깃털이 달린 인디언 추장의 모자를 쓴 누군가가 홀의 중앙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백인들이 계단에 둘러앉아 있었다. 연주자를 향해 앉아 있는 가족들도, 다른 곳을 향해 몸을 돌린 사람들도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광경이었기에 연주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진짜 인디언이었는지, 분장만 한 사람인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나는 바닥으로 내려오자마자 연주자를 보지도 않고 서둘러 그 자리를 나왔다. 워싱턴에 와서 박물관만 찾아다니던 나는, 그 전시물만은 볼 수 없었다. 관광객은 인디언의 유물을 보며 호기심을 채우고 인디언은 조상들의 유산을 소리치는, 모든 것들이 적확한 위치에 있는 광경에서 기괴함을 느꼈다. 

 

 <플라워 킬링 문>은 다시는 느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격발했다. 이 영화는 서스펜스를 터트리지 않는다. 반복적인 컷이나 격정적인 대사를 의도적으로 담지 않으려는 모습은 감독의 전작 <아이리시 맨>을 연상시킨다. 대사를 드러낸 이번 작품을 채우는 것은 화면 구성이다. 인물과 세트 구성, 그리고 조명의 활용이 기본이라는 것을 또다시 상기시켜준다. 지속해서 들리는 낮은 소리의 배경음과 배우들의 열연에 휩쓸리다 보니 한 감정에 도달하게 되었다. 8년 전에 그 박물관에서 느껴졌던, 익숙한 기괴함이었다. 벼랑 끝으로 몰린 인디언이 천민자본주의에, 전쟁에서 돌아온 주인공은 견고하게 설립된 가족과 그들의 전통적인 사업에 들어오며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의 끝에서 그들은 변하고 성장했을까. 역사는 시간에 박제된 사실이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악의들이 어설프게 봉하게 된 후에도 인디언들은 소모성 전염병과 잘못된 식습관으로 죽어갔다. 주인공마저도 결국 끝까지 갈등하는 인간으로 남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고정된 과거에 잘못된 시작을 따지는 게 의미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각자의 집단에서 부여된 역할을 의심 없이 행했던, 기괴했던 시대의 유산을 끔찍하고 환상적으로 재현한 다큐멘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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