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담은 지구의 조각들
귀국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교환학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5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을 보냈다. 여행자로서, 관찰자로서,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그 아름다운 도시를 잔뜩 머금었다. 그러다 시간이 날 때면 망설임 없이 떠나곤 했다. 독일, 네델란드와 같은 인접 유럽 국가부터 낯설고도 먼 아프리카까지 20개가 넘는 도시를 다녀왔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를 맡겨놓은 사람처럼, 돌려받을 것이 있는 사람처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나는 그리 특별한 ‘여행자’가 아니다. 여행 자체가 특별한 무언가도 아니다. 여행은 늘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운 상황에서 덜컥 시작되곤 하는데 실로 그뿐이다. 그러나 한 공간이 개인의 고유성과 만나면 각자에게 전혀 다른 의미와 기억이 되어 존재하게 된다. 결국 여행은 공간의 무한 확장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기회인 셈이다. 그게 내가 지금부터 밀린 기행문을 쓰려는 이유다. 내가 방문한 공간들이 고작 '나'라는 사람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존재하는지 들여다보려 한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공간을 살아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니 말이다. 같은 장소여도 누구와 어떻게 여행하는지에 따라 느낄 수 있는 것이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공간이 있다는 것인가.
지난 5개월은 나만의 여행법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여행법이라고 해서 거창할 건 없다. 나는 어떤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각 도시마다 어떤 템포로 있는 것이 좋은지, 내 컨디션에 따라 혼자 여행하기 좋을 때와 함께 여행하기 좋을 때는 언제인지, 장기 여행 중 어느 주기로 사람을 만나줘야 하는지, 내가 그 도시에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 주어진 공간을 항유하는 나만의 방식과 기준을 의미한다.
문득 이번 해외 생활의 첫 목적지였던 튀르키예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생각났다. 전 세계를 떠돌며 여행과 일을 병행하는 디지털 노마드 부부였다. 당시 혼자 카파도키아를 여행하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신 분들이다. 그들은 긴 여행을 앞두고 있는 나를 위해 자신들의 여행담을 들려주셨다. 높은 확률로 가장 먼저 여행한 나라를 제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여행을 반복하다보면 자신만의 여행 스타일이 생길 거라는 내용이었다. 햇볕에 오래 그을린 피부 사이 반짝이던 그들의 눈, 그리고 따뜻하게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왜인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자신만의 여행법을 찾게 되면 그때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될텐데 내가 어떤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을 다루게 될지 궁금하다는 말도 함께.
나는 여행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까 아무래도 좋을 것이라고 답했는데 여행을 계속할수록 그들이 얼마나 귀한 조언을 건넨 것인지 깨달았다. 여행을 하다보니 그동안의 내가 사람과 공간, 그리고 순간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만 가지고 낯선 공간에 덩그러니 놓이면 사소한 것들도 분명해진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내 기호를 파악하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모든 자극들에 대한 기분을 살피는 과정을 반복하니 '나만의 여행법'이라 칭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행 중반부터는 여행의 이유, 목적, 방법이 분명해졌고 늘 더 편안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여행은 계속되었다. 대체로 혼자 떠났고, 가끔씩 동행을 구했으며, 어떤 날에는 친구와 함께였다. 홀로 여행하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길 위에서 맺어진 인연도 있다. 모코로 여행에서는 80명의 유럽 학생들 사이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집단에 소속되어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그리운 이름이 잔뜩 생겼다. 나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된다. 단순히 떠났을 뿐인데 수없이 비워내고 채우기를 반복한다.
이스탄불에 유학가있던 친구 집에 얹혀 지내며 여행했던 튀르키예를 시작으로 ‘이제는 정말 잘 여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홀로 떠났던 10일간의 동유럽 여행까지. 다녀온 도시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수십 개의 얼굴이 새겨지고, 혀가 기억하는 맛이 늘어가고, 가슴 벅찬 풍경이 쌓여갔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가며 살아낸 순간은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런 순간을 살아냈다는 사실이, 그 장면들이, 그 얼굴들과 감정이 그렇게 내 인생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이제 그 순간들을 정제된 언어로 담아내는 작업을 하려 한다. 내 경험과 감상이 누군가에게 닿아 무언가를 떠올리거나 깨닫게 만드는 작은 조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