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담 Apr 16. 2023

그렇게 겁쟁이의 여행은 계속된다

평화로운 괴레메 마을의 평화롭지 않은 하루

튀르키예 여행 5일 차에 접어들었다. 이스탄불에 이어 향한 곳은 튀르키예 내륙에 위치한 카파도키아였다. 친구가 살고 있어서 여러모로 수월했던 이스탄불 여행과 달리 카파도키아 여행에서는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했다. 한국에서도 혼자 여행을 다니곤 했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른 해외에서 혼자 하는 여행은 또 달랐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네브셰히르 공항까지 비행기로 한 시간, 공항에서 괴레메 마을까지 셔틀버스로 한 시간. 창 밖에 펼쳐진 경이롭고 기이한 지형을 눈으로 담느라 내내 정신이 없었다. 하늘이 거뭇해지고 나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드넓은 대지 위에 기암괴석들이 줄지어 있는 그곳은 ‘이질적’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꼭 다른 행성 같았다.


작은 식당과 파키스탄 군인

체크인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러 밖으로 나섰다. 숙소는 1박에 3만 원이라는 싼 가격을 자랑했지만 그만큼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호텔 근처에는 공사장과 주택, 그리고 너른 벌판만 있었을 뿐, 그 흔한 마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고작 8시가 넘었을 뿐인데 거리가 썰렁했다. 갑자기 두려움이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 이 낯선 땅에서 아주 취약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과 그런 나를 지켜보거나 지켜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공포인 듯했다. 해외여행은 원래 이런 위험 부담을 가지고 해내는 것임을 그제야 자각했다. 긴장감이 미미하게 지속되었다. 친구는 전 세계 90%의 사람들이 너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농담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157cm의 마른 체구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썩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그 사실을 유념하기로 했다.

낮에 찍은 호텔 앞 풍경, 정말 허허벌판이다

하루 종일 굶은 탓에 식당을 찾으러 나섰지만 대지 위에 깔린 어둠이 괜히 무서워 호텔 주위를 배회할 뿐이었다. 용기 내어 모퉁이를 하나 돌았더니 불이 꺼진 식당 안에서 사람들이 언뜻 보였다. 입구에서 인기척을 내었더니 한 가족이 분주하게 나를 맞이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와 아들, 네 식구가 단란하게 운영하는 작은 가게였다. 식당에 들어섰을 때 이들이 보인 분주함을 보아하니 짐작하건대 내가 그날 저녁의 첫 손님인 듯했다. 그 말은 즉 이 가게의 맛은 보장할 수 없으나 주인의 다정함과 친절함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날이 마침 한국의 ‘복날’이라 닭고기 케밥을 시키고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인적이 드문 길목에 위치한 식당이었기에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빨리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음식을 기다리는 와중에 자꾸만 눈에 들어오던 주인네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왜소증을 앓고 있는 듯한 아이는 공놀이를 하자며 엄마를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주문한 음식을 모두 내어준 다음 둘은 식당 앞에서 공차기를 했다. 발차기 한 번에 모래 바람이 날려 내 케밥 위에 무언가가 자꾸 쌓이는 듯했지만 그 정겨운 풍경이 마냥 좋아서 잠자코 먹었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서 주전자를 꺼내오시더니 차이를 따라주셨다.

차이를 마시고 있는데 식당 앞에 자동차 한 대가 멈춰 서더니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내렸다. 카파도키아를 자꾸 카파도씨아라고 발음하던 이 남자는 주문을 마치고 테라스에 혼자 앉아있던 나를 보더니 반갑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자신은 사우디아라비아에 파병된 파키스탄 출신 군인이며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내와 함께 중동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간 어떤 도시를 여행했는지, 튀르키예의 어떤 부분이 좋은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친척 이야기 등등 나는 차이를 홀짝이며, 아저씨는 음식을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니 너무 대단하다. 네가 꼭 이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갔으면 좋겠어. 그리고 너라면 분명 그럴 거라는 믿음이 들어. 그리고 내가 군인이잖아. 너에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언제든지 도와줄게. 우리는 누군가를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다음 날, 그는 아내와 함께 괴레메를 떠날 예정이었고, 내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은 아무래도 없을 거였지만 그럼에도 나의 안전과 평안, 그리고 즐거움을 눈앞에서 기원해 주는 사람을 보고 있으니 포만감과 든든함이 밀려왔다. 타지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경계심과 두려움이 그 잠깐의 대화만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주인 가족의 따뜻함도 한몫했다. 이 가게의 주인이자 엄마이자 딸이던 젊은 여성은 자신이 직접 그린 꽃 그림이 담긴 카드를 건넸다. 그 외에도 음식이 입에 맞는지, 오렌지 주스에 얼음은 얼마나 넣었으면 하는지, 온 가족이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왔다. 그 모든 것이 참으로 다정해서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차이만 3잔을 연거푸 마셨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가족들에게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 뒤로도 괴레메 마을에 머무는 동안 이 식당 앞을 지나갈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온 가족이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주었다. 혹시나 그들의 눈에 띄지 못했을 땐 괜히 걷는 속도를 줄이고는 식당 앞을 느긋하게 지나가 보는 것이었다. 그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괴레메 호텔에서 일어난 일

한밤중에 일어난 어처구니없고도 웃픈 이야기를 쓰기에 앞서, 내가 머문 호텔의 구조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겠다. 내가 머문 호텔은 총 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로비와 식당이 한 건물, 나머지 호실들은 별도의 건물에 있다. 내가 머문 호실은 로비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외진 곳에 있었으며 복도의 센서등이 빠른 속도로 꺼지는 건물이었다. 도어록의 나라에서 온 나는 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열쇠와 긴 시간 씨름을 해야 했는데 그러다 불이 꺼지면 오싹한 마음에 재빨리 파닥거리며 불을 켜곤 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난 해외여행이고, 타지 생활이 낯설던 때라 더 쉽게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던 것 같다.


베란다 문을 열면 흙먼지와 후끈한 바람, 쨍한 햇볕이 들어오던 내 방
기가 막히던 테라스 뷰

뭐 어쨌든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앞다투어 걱정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쉽게 긴장한다. 유달리 겁도 많은 편이다. 그날도 혼자 숙소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바깥 (흙먼지) 바람이 쐬고 싶어져 베란다 문을 열었다. 한껏 테라스 뷰를 즐기고 들어와서 문을 잠그려는 데 열쇠가 부러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야외로 통하는 문을 잠글 길이 없었다.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로비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려니 건물 사이의 길이 무섭게 느껴졌고 로비와 연결된 호실 전화기도 불량이었다. 대충 커튼 끈으로 테라스 문과 책상을 연결해 묶어두고 잠에 들었다. 누군가 이 방에 침입하는 상상을 잔뜩 하고 잔 탓에 작은 소음에도 깨기를 반복했다.


괴레메를 잔잔하게 감상하기 좋았던 마을 구석의 호텔
문제의 문고리

눈을 뜨자마자 피곤에 절인 몸을 이끌고 로비로 향했다. 그러자 직원은 내 얘기를 듣고 싱긋 웃으시더니 내 방으로 오셔서 ‘유럽식 창문을 잠그는 법’을 알려주셨다. 손잡이를 위로 두 번 꺾어 올리니 문이 쉽게 잠겼다. 열쇠는 애초에 쓰이지 않았던 것이다. 직원은 이 부근의 창문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작동하니 열쇠가 없어도 걱정하지 말라며 웃어 보였다. 이 얘기를 이스탄불에 살고 있던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는 깔깔거렸다. 이곳에서 흔한 창문 잠그는 방법을 모르는 것도, 그걸 몰라서 혼자 겁에 질려 있었다는 것도 웃긴 눈치였다. 이 사건을 통해 내가 정말 겁이 많고 물렁거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의 5개월 남짓의 해외 생활이 아득히, 그리고 아찔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문고리 사건(?) 다음 날, 직원이 선물이라며 가져다 준 과일 박스

해외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뤄야 하는 상황이 많다. 카파도키아처럼 낙후된 지역일수록 더 그렇다. 특히 괴레메는 흙먼지가 대단해서 샤워를 안 하고는 견디기 힘든데, 문제는 한 번 씻는 것조차 힘들다는 거였다. 호텔 샤워 부스에는 한국의 8~90년대식 수전이 있었고, 찬물과 뜨거운 물의 비율을 각각 조절해서 수온을 맞추는 방식이었다. 사용법이 익숙지 않아서 여러 번 화상을 입을 뻔했고 결국 이를 꽉 깨물고 찬물 샤워를 해야 했다.


초반에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갖가지 고됨마저 재밌게 느껴졌다. 그러나 불편함과 불안정함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지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괴레메에서의 나날이 거뜬했던 건 나의 서투름과 머뭇거림이 당연하다고 말해주던 현지 사람들 덕분이다. 그들의 조건 없는 친절을 받고 있으면 멀리 떠나왔기에 가능했던 즐거움과 사랑을 되새기게 됐다. 그러면 모든 것은 놀라운 속도로 괜찮아졌다. 너른 벌판을 메운 어둠도, 화상을 입게 하는 수전도, 성하지 못해 두려움을 안기던 창문과 전화기도, 입이 텁텁해지던 흙먼지바람과 따가운 햇볕도.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렇게 겁쟁이의 여행은 계속된다


이 글의 출처: 괴레메 마을을 떠나던 날, 호텔 로비에서 쓴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면 내 여행의 목적은 ‘해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