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구치 호수에서 바라보는 후지산
(2025/07/25 (금)의 일기. 종이 작성 2025/08/05 (화). 온라인 작성 2025/08/22 (금) )
어젯밤 아들의 요청으로 급 결정된 후지산 일정. 여행지에서 숙면을 취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행지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여러 교통수단 중 아들의 기차 선호를 반영하여 신주쿠 역에서 가와구치코 역까지 가는 후지카이유 7시 30분 출발 열차를 타기로 하였다. 아침 6시에 식구들을 깨우고 오카치마치 역, 간다 역을 거쳐, 신주쿠역 (야마노테선/추오선 환승)에 도착. 차내 안내방송을 미리 듣고 빠르게 특급이 오는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플랫폼 내의 특급권 발매기를 이용하여 특급권을 구매. 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은 탓에 좌석이 만석이라 좌석 미지정 티켓을 구매한다 (그래도 금액은 똑같다 ㅠㅠ). 시간이 촉박하여 서둘렀는데, 표를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열차가 들어온다. 일단 타자마자 비어있는 자리에 식구들을 앉게 하고, 나는 차량칸 사이의 화장실과 출입문이 있는 공간에 선 채로 목적지를 향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특급열차는 "자유석"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지정석"보다 티켓가격은 약간 저렴하지만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그런 티켓이 있었다. 열차에는 지정석 자리만 있는 열차 칸 이외에 별도로 자유석 전용칸이 있는데, 자유석 표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 자유석 전용칸에 빈자리가 있으면 어디든 앉을 수 있는 방식이다. 물론 선착순이고 자유석 표는 좌석보다 많이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면 입석처럼 서서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구매한 티켓은 소위 "좌석미지정 티켓"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자유석"과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으로, 최근 JR특급에서 "자유석" 제도를 없애고 도입한 것 같다. "좌석미지정 티켓"이 도입된 특급열차는 기본적으로는 전석 지정석으로 자유석 전용칸이 없는 대신, "좌석미지정 티켓"을 소유한 사람은 아직 점유되지 않은 좌석에 앉을 수 있는 방식이며, 점유되지 않은 좌석인지 (즉, 미지정 티켓 소지자가 앉아도 되는지)는 좌석 윗부분의 표시등 (초록이면 가능, 빨강이면 불가능)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기존 자유석 방식에 비해 앉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줄어드는 것 같지만, 열차회사 입장에서는 더 효율적으로 좌석을 운영할 수 있는 방식인 듯하다.
각설, 겨우 출발 시각에 맞춰 급히 타느라 미처 확인을 못하였는데, 타고 보니 우리가 탄 객차는 특급 아즈사 차량이어서 종점이 가와구치코가 아닌 마츠모토 방향으로 향하는 차량이었다. 우리가 탔어야 하는 후지카이유는 뒤편 객차에 연결되어 있고, 별개의 열차가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에 통로를 통해 이동할 수 없다. 도중 오오츠키 역에서 분리되어 운영되는 방식으로, 우리는 오오츠키 역에서 열차가 분리되는 동안 뒤편 객차로 옮겨 타고 가와구치로 이동한다.
가와구치코 역에 가까워질수록 그동안 후지산 (혹은 가와구치코)에 꽤 여러 번 왔었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과거에 다녀간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당시에는 번거롭게 여행 장소에서 사진을 남기는 것을 귀찮아했고, 간혹 찍어둔 사진이 있더라도 제대로 백업을 해두지 못한 터라 딱히 남겨진 기록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 머릿속, 마음속에 남아있는 경험 자체가 사진 같은 것들보다 더 소중하다고 치기 어린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와 서보니 그런 기록들이 없으면 나의 망각과 함께 그런 모든 기억은 어디에도 남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나도 어느덧 나이가 있는 탓인지 그런 사라져 가는 기억이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웠다. 그러한 탓에 얼마 전부터는 여행지에서 가급적 많은 사진/영상 기록을 남기고, 나아가서 이처럼 글로도 남겨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터이다.
여하간, 더 잊기 전에 생각난 김에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후지산에 방문하였던 기억 중 남은 기억을 적어본다.
1. 일본에 인턴으로 홀로 와있던 시절, 나와 같은 곳에 인턴으로 왔던 중국인이자 미국유학생인 T군과 함께 이곳 가와구치 호수에 왔다. 당시에는 1~2 day pass (관광용 무제한 교통 패스)를 구매하여, 유람선/로프웨이도 타고, 버스를 타고 어딘가 떨어진 장소의 전통 민속마을이나 동굴에도 가는 등, 패스 뽕을 뽑을 생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T군의 위시리스트로 함께 어딘가의 온천에도 다녀왔던 것 같다.
2. 가족과 함께 막 일본에 와서 살기 시작하던 시절, 부모님께서 오셔서 후지산 고고메 (후지산 높이의 중간지점)까지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아들은 아직 한참 어릴 때라 등산은 하지 않았고, 그날 날씨도 좋지 않아 구경하기에 불편한 여건이었던 것 같다.
3. 잠시 식구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지내고, 혼자 일본에 있던 시절, 마침 대학시절 같은 학부 선배가 회사업무차 일본에서 잠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종종 어울렸는데, 그때 둘이서 당일치기(!)로 후지산 등반을 다녀왔다. 당시 꼭대기에서 찍은 기념사진은 인화된 상태로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있다. 인생 처음으로 고산병이 무엇인지 체험하게 된 날.
4. 막냇동생이 놀러 왔을 때, 주말에 함께 당일치기로 가와구치에 방문. 이때의 기억은 유난히 흐릿하여 동생에게 확인해 보니 마침 사진이 몇 장 남아있어서 기억을 아슬아슬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가와구치 호수에서는 후지산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아쉬워, 돌아오는 도중에 미츠토우게三つ峠역에서 내려 근처 어딘가 육교에 올라가서 후지산이 잘 보이는지 다시 확인하고 돌아갔던 기억.
다시 이번 여행으로 돌아와서.
가와구치코 역에 도착하니 대합실에는 이미 엄청난 외국인 관광객 인파가 서성이고 있다. 저녁시간에 도쿄로 올라가는 상행열차는 이미 만석이라 (마찬가지로 좌석미지정 티켓만 구매가능) 불편할 듯하여, 기차역 개찰구 바로 옆에 있는 버스터미널 매표창구에서 신주쿠로 올라가는 표를 미리 구매해 둔다.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후지산을 찍을 수 있는 사진 명소로 유명해진 로손 편의점에 들러 끼니로 때울만한 도시락을 둘러보는데 (오늘도 아직 밥을 못 먹었다ㅠ), 워낙 붐비는 장소여서인지 편의점 내부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적당히 아들 간식만 사서 나온다.
사진 명소라지만, 후지산 정상 부근에 커다란 구름이 끼어있어 기대만큼의 장관을 보여주지 못한다 (산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라는 동요를 불러본다. 아들은 이 노래를 알까?). 배도 고프고, 오늘도 역시나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더위인 관계로 역 근처에 봐두었던 다소 허름하고 오래돼 보이는 식당으로 서둘러 피신한다 (아마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았다면 더 마음에 드는 식당을 찾아다니느라 허비했을 텐데, 어제의 교훈으로 주린 배는 급히 채우는 것이 즐거운 여행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안다). 막상 들어와서 보니, 미처 생각지도 못하였는데 이곳이 2층인 데다 역 맞은편에 위치하여 통유리창을 통하여 앞쪽 전망이 보이는데, 전체 조망이 후지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향하고 있어서, 비록 음식이 맛없다 할지라도 훌륭한 전망 덕에 충분히 보상이 될 터였다. 게다가 밖은 무더위 찜통인데 건물 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지 아니한가.
각설, 마눌과 아들은 가츠동을 주문하고, 나는 와카사기(ワカサギ 빙어) 정식을 주문한다. 가츠동은 무난하게 먹을만하였으나, 빙어 정식은 조그만 빙어튀김이 5~6조각 정도 나오는데 양이 적고, 맛도 그냥저냥이라 아쉽다.
창 밖으로 보이는 후지산은 로손 앞에서 볼 때보다는 훨씬 웅장해 보였고, 한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공룡의 등비늘을 연상하는 듯한 울퉁불퉁하고 산세가 험준한 산들과는 달리, 평평하고 밋밋한 산등성이가 시야 밖 저 멀리서부터 서서히 시작되어 완만하게 올라 해발 약 3천 미터 높이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장애물의 방해도 받지 않고 부드럽게 직선을 그리며 뾰족한 봉우리를 그려낸다. 이것이 한국 (및 아마도 다른 나라의) 여타 산들과는 다른 느낌의 웅장한 아름다움을 펼쳐낸다 (물론, 한국의 많은 산들에서도 색다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다만, 후지산이 주는 느낌은 그것들과 다르다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글이 길어지니, 나머지 부분은 2부에서 계속...)